News/살인자

2008.05.03 조광식 전 형사가 주장하는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 내막

류. 2019. 10. 15. 14:09



1988년 1월 수원여고생 강간·살인사건 용의자 중 한 명이 경찰조사 중 뇌사상태에 빠져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일명 ‘명노식 군(가명·18) 고문·구타 사망사건’으로 지칭된 이 사건은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는데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한 날이 공교롭게도 박종철 군 사망 1주기였다.



이 일로 당시 수원경찰서장과 수사과장, 형사계장이 줄줄이 직위해제되고 폭행에 개입한 강력반 형사 3명이 구속됐다.


당시 수원경찰서 강력반 형사였던 조광식 씨2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수사시작부터 구속까지 걸린 시간은 딱 열흘. 조 씨는 “그 열흘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11년간 지켜온 경찰 신분을 한순간에 박탈당한 조 씨는 그동안 경비지도자로 변신, 강연을 다니며 지내왔다. 그런 조 씨가 침묵을 깨고 최근 당시 수사자료 등을 토대로 한 권의 수기를 펴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여전히 명 군 사망원인과 관련, ‘결백’을 주장하고 “그들은 범인이 맞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기에는 당시 용의자로 지목된 명 군과 정민수 군(가명·19)이 왜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의 범인인지에 대해 자세히 기술돼 있다.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지만 조 씨는 “비록 21년이 지났지만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들”이라며 비난이나 법적인 분쟁도 감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를 만나 사건의 내막에 대해 들어봤다. 


“그 일로 화병을 얻었습니다. 억울해서요. ‘운명’이라고 위로하면서 마음을 추스르지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조 씨의 수기는 용의자들과 나눈 얘기들, 진술서 등 그간의 모든 수사자료를 총동원해 엮은 것이다. 수기를 통해 조 씨는 ‘그들에게 구타나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끌어낸 적이 맹세코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범인임을 확신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들은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상황들을 정확히 짚어냈고 분리된 상태에서 써내려간 자술서에서도 그들은 범행과 관련해 동일한 진술을 했다’는 것이다.  



사건은 지난 1988년 1월 4일 수원시 화서동 193번지 논바닥에서 하의가 벗겨진 한 여성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피살자는 현장에서 10분 거리에 살던 여고생 김순희 양(가명·18)이었는데 양 손과 목이 스타킹으로 결박돼 있었고 팬티로 재갈이 물려 있었다. 또 얼굴은 부어 있었고 강간당한 흔적이 있었다. 수사결과 김 양은 87년 12월 24일 저녁 어머니와 다투고 집을 나선 후 실종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부검결과 그날 밤 11시에서 다음날 새벽 2시 사이에 살해된 것으로 확인됐다.



여섯 번째 화성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반년이 조금 지난 때였다. 수사에 투입돼 현장 주변을 탐문하던 조 씨는 한 주민에 의해 ‘동네 불량배 A 군(17)이 친구들과 현장 인근을 돌아 다니며 본드도 흡입하곤 한다’는 제보를 듣는다. A 군을 조사하던 수사팀은 “저녁 9시가 지난 무렵 현장에서 명 군과 정 군이 논바닥 쪽에서 불을 피우며 놀았다”는 진술을 확보한다. 대질결과 명 군으로부터 사실이라는 대답을 들은 조 씨는 나머지 한 명인 정 군의 소재파악에 나섰다.



하지만 현장에서 300m 거리에 살고 있던 정 군은 수사가 시작되기 전인 12월 29일부터 용인에 있는 외숙모댁에 가 있었다. 수사팀은 둘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행적을 캐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건발생 이후 갑자기 사라진 또 다른 동네 불량배이자 명 군의 친구인 B 군(18)을 조사하던 중 조 씨는 충격적인 증언을 듣게 된다. 명 군은 친구 B 군에게 12월 28일 밤 10시경 화서동의 오락실 앞에서 “사람을 죽였다. 수원을 떠나 도망가야겠다. 절대 얘기하면 안된다. 내가 입던 빨간 점퍼를 가져가 입으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실 확인을 하는 조 씨에게 당시 명 군은 “내 점퍼를 B 군이 입으면 범인으로 몰려 내가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고 한다.사건은 의외로 쉽게 풀리는 듯했다. 당시 수사팀은 명 군과 정 군을 분리해서 자술서를 받았다. 우선 이들이 그린 사건현장 약도는 김 양이 피살된 곳과 일치했다. 또 이들은 범행방법이나 과정에 대해 공통된 진술을 했다. “귀가하는 김 양을 칼로 위협, 입을 막고 각목으로 때리고 성폭행한 뒤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짚더미에 숨겨놓고 도주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김 양이 입고 있던 옷과 운동화에 대해서도 같은 진술을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서로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 정 군은 “목을 조르고 강간한 것도 명 군이다. 나도 강간하려했으나 기분이 좋지 않아 못했다”고 했으나 명 군은 “정 군이 목을 졸랐다”고 진술했다. 자백이 확보된 이상 남은 것은 증거확보였다. 그리고 추궁 끝에 수사팀은 김 양을 위협하는 데 사용된 칼과 스타킹을 자른 칼을 정 군의 외숙모 집과 정 군의 집 근처에서 발견했다.  



이 정도로도 증거는 충분했지만 수사팀은 쐐기를 박기 위해 더욱 결정적인 증거를 찾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바로 피해자 김 양이 차고나간 시계였다. 조 씨는 명 군에게 시계의 행방을 캐물었다. 이때 명 군은 “증거물을 찾으려는 거지요? 근데 우리가 범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장 근처인 화서동 숙지산 중턱에 파놓은 비트(땅굴)에 대해 명 군은 “범행 후 숨어서 먹고 자고 본드도 마시고 그랬죠”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지나가는 여자를 상대로 범행을 했으며 정남면 쪽에서 한 명을 죽였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또 화서동에 살면서 화성까지 어떻게 갔느냐는 질문에는 “기찻길을 따라 가서 범행 후 기찻길로 되돌아오곤 했어요. 경찰 검문·검색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죠”라고 답했다는 것. 명 군이 무심코 내뱉은 말들은 조 씨가 명 군 등을 미제로 남아있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의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정 군은 조 씨를 붙들고 “교도소 가면 어떻게 돼요?”라고 물었고 명 군은 “그 시계 안 찾으면 안되나요?”라고도 했다.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을 막기 위해서는 김 양이 차고 있던 시계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수사팀은 결국 명 군을 추궁해 시계를 묻었다는 수원시청 근처 88공원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시계’에 대한 집착은 수사팀원들의 운명을 갈라놓고 말았다. 시계를 찾던 중 명 군이 수갑을 찬 상태로 산 밑으로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쫓아간 동료 형사가 명 군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를 잡던 중 두 손으로 밀쳤는데 명 군은 울퉁불퉁 꽁꽁 얼어붙은 땅 위에 후두부를 부딪히며 나자빠졌다.



명 군은 이날 밤부터 유치장에서 심하게 앓았는데 수사팀은 1월 12일 아침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명 군을 방치해뒀다.결국 명 군은 뇌사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이 사건은 ‘청소년에 대한 고문·가혹수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때가 공교롭게도 박종철 군이 사망한 지 1년이 되던 날로 인권침해 고문경찰에 대한 소식은 사회의 공분을 샀다. 결국 경찰 간부들이 줄줄이 직위해제됐으며 조 씨를 포함한 형사 3명이 실형에 처해졌다. 조 씨는 지금도 “내 양심을 걸고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끌어낸 사실이 없다.  



명 군의 사인은 그날 도주하다 잡히는 과정에서 후두부를 부딪힌 것이다. 당시 부검을 실시한 서울대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가 ‘폭행으로 인한 사망이 아닌 것 같다’는 소견을 내놓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명 군을 붙잡을 때 협조했던 건설회사 간부의 증언도 있었지만 소용없었다”고 주장한다.어쨌거나 명 군은 37일 동안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다 사망했고 조 씨 등은 ‘악질 고문 수사관’이라는 치욕스런 오명하에 죽은 듯 지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