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 이춘재 생애
출처 http://www.donga.com/ISSUE/Vote2016/News?m=view&date=20191003&gid=97707178
연쇄살인범 이춘재 사건 일지(1986~1994)
그래픽 출처 https://news.v.daum.net/v/20191015150754111
참조
1996년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 일지. https://u21design.blog.me/221663840620
1986년
△1차 사건 = 9월 15일 오전 6시 20분. 태안읍 안녕리 목초지. 이 아무개 씨(71, 이하 사건 당시 나이)
△2차 사건 = 10월 20일 오후 8시.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 박 아무개 씨(25)
△3차 사건 = 12월 12일 오후 11시. 태안읍 안녕리 축대. 권 아무개 씨(24). 시신은 1987년 3월 발견
△4차 사건 = 12월 14일 오후 11시. 정남면 관항리 농수로. 이 아무개 씨(23)
1987년
△5차 사건 = 1월 10일 오후 8시 50분. 태안읍 황계리 논바닥. 홍 아무개 양(18)
△6차 사건 = 5월 2일 오후 11시. 태안읍 진안리 야산. 박 아무개 씨(30)
△여죄 추정 사건 = 12월 24일. 수원 화서동 논바닥. 김 아무개 양(18)
1988년
△7차 사건 = 9월 7일 오후 9시 30분.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 안 아무개 씨(52)
△8차 사건(모방범죄) = 9월 16일 오전 2시. 태안읍 진안리 가정집 안방. 박 아무개 양(13). 범인 검거
1989년
△여죄 추정 사건 = 7월 3일. 수원시 오목천동 농수로. 정 아무개 양(17)
△여죄 추정 사건(실종사건) = 7월 18일. 화성 태안읍. 김 아무개 양(9)
△강도 혐의 기소 = 9월 26일
1990년
△청주에서 포클레인 기사로 근무 시작 = 1~2월경
△강도 혐의 선고 = 4월 19일.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
△9차 사건 = 11월 15일 오후 6시 30분 태안읍 병점5리 야산. 김 아무개 양(13)
1991년
△여죄 추정 사건 = 1월 27일 오전 10시 50분쯤. 청주시 가경동 공사 현장. 박 아무개 양(17)
△10차 사건 = 4월 3일 오후 9시 동탄면 반송리 야산. 권 아무개 씨(69)
△결혼 = 7월
1992년
△여죄 추정 사건 = 4월 23일 오전 8시 20분쯤. 청주시 강내면 경부고속도로 확장 공사장. 20대 여성
△아들 출산
1993년
△청주로 이사 = 4월
△아내 가출 = 12월
1994년
△처제 성폭행 살해 = 1월 13일
얼굴 없는 범인의 실체가 드러났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던 이춘재(56)가 비로소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이춘재는 10월 1일 경찰조사에서 모방범죄로 드러난 8차 사건을 제외한 9건의 화성연쇄살인사건 전부를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했다. 동시에 9건의 사건을 제외한 또 다른 5건의 살인사건도 자신이 저질렀다고 털어놓았다. 경찰은 이춘재의 자백에 대해 추가 검증을 하는 한편 여죄 5건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수사를 할 계획이다. 전국민을 공포에 몰아넣은 연쇄살인범의 자백을 듣기까지 33년. 피해자의 넋을 위로하기까지 너무도 긴 시간이 흘어버렸다. 아울러 이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일요신문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으로 다시 쓴다.
‘화성의 공포’가 시작된 건 1986년 9월 15일. 수원에 채소를 팔러 나갔던 이 아무개 씨(여·71)가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러나 경찰은 새벽시간에 사망했다는 이유로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한다. 한 달 뒤, 첫 발생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한다. 연쇄살인의 시작이었다. 현장에서는 체모 2점과 담배꽁초 1개가 발견됐다.
그해 12월 12일 태안읍 안녕리 축대 위에서 숨진 권 아무개 씨(여·24)가 발견된다. 경찰이 뒤늦게 수사에 돌입했지만 범인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틀 뒤인 12월 14일 정남면 관항리에서 범행을 저지른다. 4번째 피해자 이 아무개 씨(여·23)는 맞선을 보고 귀가하던 길에 변을 당했다. 당시 피해자의 속옷에서 체액이 검출됐지만 특별한 단서가 되진 못했다.
5차 사건은 1987년 1월 10일 발생한다. 피해자는 고등학생 홍 아무개 양(18)이었다. 홍 양은 태안읍 황계리 논바닥에서 스타킹으로 결박돼 숨진 채 발견됐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5월 2일 퇴근하는 남편에게 우산을 가져다주기 위해 집을 나선 박 아무개 씨(여·30)가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성폭행 당한 뒤 숨진 채 발견됐다. 6차 피해자였다. 현장에서는 체모 5점과 머리카락 등이 나왔다.
7차 사건의 피해자 안 아무개 씨(여·52)는 1988년 9월 7일 귀가하던 중 피습돼 팔탄면 한 농수로에서 옷가지로 양손이 결박돼 숨진 채로 발견됐다. 7차 사건 이후 첫 목격자가 나왔고 당시 범인을 목격한 버스기사와 안내양의 증언을 토대로 몽타주가 만들어졌다. 이후로 한동안 ‘화성에서 살인 사건이 났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같은 달 8차 사건이 발생했지만 모방범죄였다.
화성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연쇄살인은 7차를 끝으로 잠잠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범인은 2년 2개월 만에 다시 나타난다. 9차 피해자는 1990년 11월 15일 태안읍 병점 5리 야산에서 살해된 김 아무개 양(13)이다. 김 양 역시 앞서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스타킹으로 결박된 상태였다. 9차 사건에서야 경찰은 범인의 체액을 통해 DNA를 채취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용의자의 혈액형을 B형이라고 분석했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1991년 4월 3일 자녀의 집에 다녀오던 권 아무개 씨(여·69)가 동탄면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건 현장에서 용의자의 체액이 나왔는데 당시 자료에 따르면 용의자의 혈액형은 B형 또는 O형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화성에서의 연쇄살인은 막을 내린다.
#끝나지 않은 살인…5건의 여죄와 시그니처
약 5년 동안 화성 일대를 살인의 악몽에 떨게 했던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무기수 이춘재였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DNA 분석을 통해 9월 18일 부산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춘재를 화성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는 용의자로 지목된 순간부터 8차 대면조사에 이르기까지 줄곧 혐의를 부인해왔으나 10월 1일 돌연 마음을 바꿔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이춘재의 자백은 9건에서 그치지 않았다. 경찰에 따르면 이춘재는 총 14건의 살해를 고백했다. 9건의 화성사건 외에도 화성에서 3건, 청주에서 2건의 살인 사건을 더 저질렀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춘재에게 무기징역 선고가 내려진 청주 처제 성폭행 살인사건까지 더하면 그가 살해한 사람은 15명이나 된다.
이로써 경찰은 이춘재가 군에서 제대한 1986년 1월부터 처제 살해사건이 일어난 1994년 1월을 전후로 화성과 수원·청주 일대에서 발생한 미제 사건들을 되돌아보게 됐다. 이춘재가 말한 5건의 여죄에 대해 아직까지 특정된 바는 없다. 그러나 화성사건의 범인은 스타킹·블라우스 등 피해자의 옷가지를 범행 도구로 사용한다는 독특한 시그니처(범행 특징)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보도된 살인 미제 사건 기사를 돌아보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건을 꼽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87년 12월 24일 수원에서 발생한 김 아무개 양(18) 사망 사건이다.
1988년 1월 4일 오전 11시 30분쯤 경기도 수원 화서동 화서전철역 남쪽 200m 지점 논바닥 볏짚단속에서 여고생이 스타킹으로 양손이 뒤로 묶이고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볏짚을 거둬들이기 위해 작업을 하던 논 주인이 하의가 벗겨지고 폭행당한 흔적이 있는 김 양을 발견하고 신고한 것이다. 김 양은 1987년 12월 24일 밤 11시쯤 언니와 사소한 말다툼을 하고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고 가족들은 같은 달 28일 가출신고를 한 상태였다. 가출 당시 김 양은 자주색 파카와 밤색 운동복 차림이었다.
경찰은 김 양의 양손이 스타킹으로 묶여 있다는 점, 겨울철 인적이 드문 논 한 가운데 볏짚에 덮여 숨져 있는 점 등으로 미뤄 화성사건 범죄 형태와 비슷하다고 봤다. 경찰은 10일 만에 유력 용의자 2명을 검거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한 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하면서 경찰이 강압수사를 통해 자백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담당 경찰이 재판에 넘겨지면서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가게 됐다.
1989년에 발생한 또 다른 사건도 의심을 받고 있다. 1989년 7월 3일 실종된 정 아무개 양(17)이 6일 만에 수원시 권선구 오목천동 인근 농수로에서 옷이 벗겨진 채 주민에게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정 양은 오른쪽 앞가슴과 등을 흉기에 찔린 채 반듯이 누워 있었다. 머리맡엔 양말 한 짝이 있었고 산기슭 쪽으로 50m 떨어진 지점에는 신발이 던져져 있었다.
정 양이 숨진 곳은 앞서 화성 7차 사건이 벌어진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와 멀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사건이 발생한 태안읍과도 불과 3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경찰도 화성사건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으나 당시 화성과 수원의 경찰서 사이의 공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수사는 진척되지 않았다.
실종 사건도 있었다. 1989년 7월 18일 낮 12시 30분쯤 화성 태안읍에 사는 김 아무개 양(9)이 학교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사라진 것이다. 경찰은 단순 실종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종결했지만 6개월 뒤인 1989년 12월 김 양의 치마와 책가방이 9차 사건이 벌어진 화성 동탄면 부근에서 발견되면서 의혹이 증폭됐다.
이 세 사건이 ‘이춘재의 여죄’로 주목 받는 이유는 ‘발생 시점’ 때문이다. 화성에서 발생한 1~10차까지의 사건을 살펴보면 범행 주기는 짧게는 이틀, 길게는 5개월 정도로 나타난다. 눈에 띄는 부분은 6차 사건(1987년 5월 2일)과 7차 사건(1988년 9월 7일)의 사이의 간격이다. 갑작스럽게 1년 4개월이라는 긴 공백이 생긴다. 8차 사건이 모방 범죄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뒤의 공백은 더 길다. 7차 사건 이후 9차(1990년 11월 15일)이 발생하기까지는 또 다시 2년 2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일각에서는 이 시기를 범행 공백기, 이른바 ‘냉각기’로 불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사건은 모두 화성사건이 주춤했던 냉각기에 발생했다. 고등학생 김 양의 경우 6차 사건과 7차 사건 사이에, 정 양과 김 양은 7차 사건과 9차 사건 사이에 피해를 입었다. 위 사건들을 화성연쇄살인사건 일지에 넣어보면 6차 사건(1987년 5월 2일)과 7차 사건(1988년 9월 7일) 사이의 공백은 1년 4개월에서 7개월로, 7차 사건(1988년 9월 7일)과 9차 사건(1990년 11월 15일) 사이의 공백은 10개월로 줄어든다.
이춘재가 자백한 화성 인근 지역 살인사건 3건이 바로 위 사건들이라면 결국 이춘재는 별다른 냉각기 없이 꾸준히 살인을 저질러 온 셈이다. 다만 당시 경찰만 알지 못했을 뿐.
이러한 의혹은 이미 과거에도 제기된 바 있다. 1990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는 “1988년 1월과 1989년 7월 수원에서 발생한 여고생 살해 사건도 범행수법으로 미루어 화성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화성사건의 범인이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수원으로 장소를 옮겨 범행을 계속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두 사건을 언급했다.
실제로 이춘재는 1989년 9월 26일 수원에서 강도 혐의로 기소돼 1990년 4월 19일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즈음 이춘재는 수원까지 범행 범위를 넓혔던 것으로 보인다. 기소돼 선고를 받을 때까지 잠시 살인 행각을 중단했던 시기 이춘재에게는 또 다른 변화가 생긴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 10차로 끝난 이유는 아무래도 이춘재가 거처를 화성에서 청주로 옮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춘재가 주소지를 청주로 옮기고 아예 이사를 간 것은 1993년 4월이지만 이미 1990년 1~2월경부터 청주에서 포클레인(굴삭기) 기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성과 청주를 오가며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1991년 건설회사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을 하고 1992년에는 아들까지 낳게 된다. 그러면서 서서히 청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991년 4월 3일에 벌어진 10차 사건이 마지막이 됐지만 이춘재는 청주에서도 살인행각을 이어갔다고 자백했다.
충북지방경찰청에 따르면 1991년부터 1994년 1월까지 발생한 살인 미제 사건은 5건이다. 이 가운데 가경동 사건과 경부고속도로 사건은 범행 수법에서 화성사건과 동일한 시그니처를 보여 주목 받고 있다.
가경동 사건은 1991년 1월 27일 오전 10시 50분쯤 충북 청주시 가경동 택지개발공사 현장 콘크리트 관에서 숨진 공단 근로자 박 아무개 양(17)이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박 양은 속옷으로 입이 틀어 막히고 양손은 뒤로 묶인 상태였다. 용의자가 잡히기도 했으나 최종 무죄로 판결나면서 이 사건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다.
1992년 4월 23일 오전 8시 20분쯤 한 포클레인 기사가 청주시 강내면 학천교 경부고속도로 확장 공사장에서 20대 여성이 암매장된 것을 발견했다. 사체는 땅속 40여cm 지점에서 알몸에 스타킹으로 양손이 뒤로 묶여 숨진 채 매장돼 있었다. 경찰은 사체 부패 정도로 미뤄 여성이 숨진 지 3~4개월 된 것으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이춘재 역시 청주에서 포클레인 기사로 근무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이 여죄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는 의혹이 짙어지고 있다.
이 밖에도 1991년 청주시 남주동, 1992년 4월 18일 청주시 봉명동에서 30대 여성이 살해된 채 발견되는가 하면 같은 해 6월 24일 복대동에서는 20대 가정주부가 하의가 벗겨진 채 전화기 줄에 목이 묶여 숨진 상태로 발견되기도 했다. 복대동은 이춘재가 살던 곳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 충북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일부 사건이 화성사건과 유사하나 이춘재와의 연관성 확인은 수사본부에서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춘재가 털어 놓은 청주 살인사건들은 대부분 1991년에서 1992년 사이에 발생했다. 1992년 아들이 태어나는 등 본격적으로 가정을 꾸리는 과정을 거치며 잠시 살인 행각을 중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3년 12월 아내가 가출하자 이춘재는 1994년 1월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인하는 범죄를 또 저지른다. 범행 다음 날 직접 실종신고까지 하며 또 한 번의 완전범죄를 꿈꿨던 이춘재는 결국 체포됐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현재 복역 중이다.
한편 이춘재는 자백 이후 자신이 살인 외에도 30여 건의 성범죄를 더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자백의 내용이 초기 단계이고 구체적 사건의 기억이 단편적이거나 사건에 따라 범행 일시, 장소, 행위 표현 등에 편차가 있어 추가 검증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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