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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화성 그놈' 이춘재, 강도 예비와 폭력 전과 있어도 신발 사이즈 다르다고 수사망에서 빠졌다

류. 2019. 9. 20. 09:05

1994년 청주 경찰, 처제 살인사건 직후 이춘재 체포… 스타킹 수법 유사

화성 경찰 ‘화성 사람’ 알고 소환 조사 시도했으나 공조 잘 안돼 중단

이춘재 혈액형 B형 아닌 0형으로 밝혀져… 애초 초동수사부터 헛짚어

1987년 1월 5차사건 현장인 화성 황계리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경찰. 이 장면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재연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화성 연쇄살인의 유력한 용의자 이춘재(56)가 1994년 처제 강간 후 살인사건으로 청주 경찰에서 조사받을 당시 이춘재가 화성에 연고가 있다는 걸 알고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수사 중인 화성수사본부가 신병 확보를 시도했으나 중단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화성 경찰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 신병확보를 하고 이춘재를 대상으로 적극 수사했다면 이미 25년 전 진범을 검거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19일 경찰 등에 따르면 청주서부경찰서는 1994년 처제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이씨를 체포, 경기 화성시 본가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였다. 이씨가 범행 당시 본가인 화성으로 이사하기 위해 일부 짐을 옮겨뒀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이에 화성수사본부는 청주 경찰에 “(화성연쇄살인사건과 수법이 유사해) 이춘재를 조사할 필요가 있으니 데리고 와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청주서부서는 처제 사건이 중요한 만큼 필요하면 직접 데리고 가라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청주서부서 수사팀 관계자는 “화성에서 피의자를 좀 보내달라고 했는데 우리도 바쁘니 청주로 오면 조사 가능토록 하겠다고 했다”며 “하지만 화성에서 오지 않으면서 공조가 안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는 당시 화성 경찰이 용의자 혈액형이 B형일 것이라는 추정에 집착한 나머지 이씨의 혈액형이 O형이라는 점을 파악한 뒤 신병확보에 적극적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이씨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선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이와 관련해 단 한 차례도 제대로 조사를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경찰은 33년이 지난 뒤인 지난 18일 이씨를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 10건의 연쇄살인 사건 중 3건에서 나온 DNA가 이씨의 것과 일치한 것이 증거라는 것이다.

반기수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경기남부경찰청 2부장)은 이날 경기남부청에서 가진 브리핑에서 “DNA 분석 기법을 통해 당시 10차례의 사건 가운데 5차(1987년 1월), 7차(1988년 9월), 9차(1990년 11월) 등 3차례 사건의 증거물에서 채취한 건에서 이씨의 DNA가 검출됐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9차 사건에서는 피해여성의 속옷에서 이씨의 DNA가 검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이 사건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DNA가 검출된 상태로, 지극히 수사 초기 단계”라며 “용의자 이씨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이어진 화성연쇄살인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줄곧 용의자의 혈액형을 B형으로 특정했다. 하지만 이씨의 실제 혈액형은 O형인 것으로 드러나 진범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가시지 않고 있다.

1994년 9월 16일 선고된 청주 처제 살인사건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수사 기관은 이씨의 혈액형을 상당히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여 O형으로 특정하고 있다.

반면 당시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 관계자들은 범인의 혈액형이 B형임을 확신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실제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을 만든 봉준호 감독은 2013년 10월 영화 개봉 10주년 기념 ‘관객과의 대화’ 행사에 참석해 당시 수사 기록을 토대로 “현재 50대인 1971년 이전에 태어난 B형 남성이 유력한 용의자일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이 사건의 수사팀장이었던 하승균 전 총경도 “이씨는 당시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경찰은 ‘유력 용의자는 B형’이라고 본 당시의 판단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DNA가 일치한 이씨가 여전히 유력 용의자”라는 입장이다.

경기남부청 관계자는 이날 브리핑에서 “당시 B형일 거라고 판단해 수사를 진행한 것은 맞지만, 혈액형은 동일인 여부를 확인하는데 극히 제한적인 판단 기준”이라며 “최근 DNA분석 결과가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당시 혈액형 판단에 사용한 혈흔 등이 피해자 것인지, 용의자 것인지, 제3자 것인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며 “혈액형 자체가 나오지 않은 사건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사건이 장기화한 배경에는 당시에는 현장 증거물에서 DNA를 검출해 분석하는 등 과학수사 기술이 없었다는 점이 작용했다. 국과수가 유전자 분석을 이용한 개인 식별법을 범죄사건 감정에 최초로 도입한 시기는 1991년 8월로 마지막 10번째 범행이 발생한지 4개월이 지난 후였다. 이전까지는 의류 등에 묻은 혈흔을 분석해 혈액형을 분석하는 등의 분석법이 ‘최신 기술’이었다. 증거물에서 찾은 DNA를 대조할 데이터베이스가 만들어진 건 2010년 4월 DNA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이후다.

증거를 해외로 보내 분석하는 방법도 번번이 실패했다. 1991년 4월 10차 살인 사건 이후 다급해진 경찰은 1차 살인사건 피해자 이모(당시 71세)씨 체내에서 발견된 남성 체액을 유력 용의자와 대조하기 위해 일본에 보냈다. 두 차례에 걸쳐 두 명의 유력 용의자 DNA를 일본에 보냈지만 돌아온 답변은 ‘불일치’였다. 당시 감정에 참여했던 법의학자 이정빈 가천대 석좌교수는 “세 번째 용의자도 의뢰하려 했지만 용의자 가검물(체액)이 다 떨어져 못한다는 설명을 들었다”며 “요즘 기술로는 수 백년 전 편지에 묻은 침으로도 DNA를 분석할 수 있기에 증거물만 남아있다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이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1986년 9월 15일 경기 화성 태안읍에서 이모씨가 살해당한 최초 사건 이후로 1986년 12월 14일 세 달 새 4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동안 경찰은 연쇄살인이라는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경찰은 1986년 12월 화성경찰서 태안지서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대규모 수사팀을 꾸렸지만, 1987년 1월 10일 다섯 번째 희생자인 홍모(당시 19세)양이 정남면 관항리 농수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5차 살인과 관련 최근 DNA 일치 여부가 확인된 이씨는 당시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범인은 죽었거나 교도소에 있을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경찰도 용의자가 수감됐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했어야 했다”며 “용의자 혈액형을 B형으로 특정한 것도 결국 핵심 용의자를 놓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씨의 본적지가 경기 화성군 태압읍 진안1리이고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화성에 거주했다는 핵심 단서를 혈액형에 집착하면서 간과했다는 것이다.

경찰이 초동수사 미비로 우왕좌왕하는 사이 이씨는 1994년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한 뒤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이듬해 10월 부산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는 교도소에서 묵묵히 공소시효가 지나는 것을 지켜봤다.

24년째 수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 범죄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으며,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조사나 징벌을 받지 않는 등 교도소 내에서도 유명한 1급 모범수로 생활해 왔다. 교도소 관계자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이유다.

특히 씨는 손재주가 좋아 2011년과 2012년 수감자 도자기 전시회에서 직접 만든 도자기를 출품하기도 했다. 가구제작 기능사도 취득했고, 종교모임 회장직도 역임했다.

이씨는 현재 여러 명이 사용하는 혼거실에서 독방으로 옮겨진 상태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밝혀지면서 교도소 측이 이씨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다.

교도소 관계자는 “이씨는 4등급으로 분류하는 수감자 등급에서 1급수(1급 모범수)로 분류돼 있다”며 “이씨가 화성 연쇄살인 용의자로 지목됐다는 보도를 보고 모두가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경찰의 초동수사 미흡으로 장기미제로 남겼다는 오명에도 이날 브리핑 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의사실 공표에도 불구하고 이씨의 신상을 사실상 공개한 경찰은 정작 용의자 이씨의 DNA 확보 과정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러던 중 지난 18일 오후 언론에서 ‘화성연쇄살인 용의자 DNA 확보’ 보도가 쏟아지자 당일 오후 늦게 이씨에 대한 1차 조사를 실시했다.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결과를 받은 시기와 이씨를 1차 조사한 시기에 상당한 시간차이가 있다면 경찰이 ‘DNA 결과’를 통보 받고도 이를 알리지 않은 채 숨겨왔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에 경찰은 “수사 중인 사항이라 말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출처

https://news.v.daum.net/v/20190920044320126?d=y


이춘재, 신발 사이즈 다르다고 수사망에서 빠졌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한 용의자 이춘재(56)가 당시 경찰의 강간 및 실종 사건 수사선상에 올랐던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신발 사이즈가 달라 수사망을 빠져나갔다. 경찰은 청주에서 처제를 살해한 이씨를 체포하고도 혈액형을 오인하고 공조 수사에 실패하는 등 오락가락하면서 장기미제를 자초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20일 한국일보가 입수한 경찰 문건에 따르면 이씨는 1986년 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가 구성된 뒤로 87년 88~90년, 91년 세 차례에 걸쳐 강간 및 실종사건 용의자로 수사선상에 올랐다. 86년 9월 15일부터 같은 해 12월 14일까지 4차례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화성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수사를 나섰다.

이씨가 처음으로 수사선상에 오른 것은 5차 사건 직후다. 수사본부를 구성하는 등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지만 87년 1월10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황계리(화성시 황계동)에서 홍모(19)양이 잔혹하게 살해되는 다섯 번째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이 이씨를 용의대상에 올려 수사를 벌이는 와중에도 6차(87년 6월 2일)와 7차(88년 9월 9일), 8차(88년 9월 16일) 범행은 계속됐다.

이씨는 8차 사건 이후 유력한 용의자로 압축됐다. 사건 현장에서 DNA를 확보한 경찰은 다른 용의자들과 함께 이씨의 체모를 채취해 비교하는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DNA 대조에서 불일치 판정을 받고 이씨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당시 경찰이 범인을 혈액형이 B형인 남성으로 특정한 상황에서 DNA까지 달랐기에 혈액형이 O형인 이씨는 자연스레 후보군에서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 수사 기록에는 이씨 신발 사이즈가 8차 범인과 다르다는 점도 기록됐다.

8차 사건은 공교롭게도 모방범죄로 결론이 났다. 범인 윤모(당시 22세)씨는 사건 발생 1년 만인 89년 7월 검거됐다. 만약 당시 경찰이 현장에서 확보한 증거의 DNA를 이씨의 것과 대조했다면 불일치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셈이다. 최근 DNA대조에서도 이씨는 5차, 7차, 9차 사건의 범인으로만 지목됐다.

이렇게 수사망을 피한 이씨는 94년 1월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강간한 뒤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 이씨는 같은 해 1·2심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돼 이듬해 재상고심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경기남부경찰청은 최근 들어서야 기존에 보관 중이던 증거물을 재감식해 이씨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

경찰이 이씨와 이전 사건의 연관성을 차분하게 검토했어도 추가 범행은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당시 화성에 거주하는 젊은 남성은 대부분 조사했는데, 8차 사건과의 관련성이 없다고 놓쳤다면 당시 체계적인 수사 시스템이 없었다고 반증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씨는 경찰 2차 조사에서도 혐의를 부인했다. 경기남부경찰청 중요미제사건전담팀은 18일에 이어 19일에도 형사와 프로파일러 등 7명을 이씨가 수감 중인 부산교도소로 보내 이씨를 만났지만 부인 진술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DNA가 일치하는 유력한 단서를 제시했지만 이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경찰은 다른 사건 증거물 DNA 감식 결과를 기다리는 한편 당시 사건 기록 등을 재검토하면서 이씨의 혐의점을 분석, 이씨를 상대로 조사를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출처

https://news.v.daum.net/v/20190921044237220



강력범죄 '화성 토박이' 이춘재 놓친 이유?


[뉴스투데이] ◀ 앵커 ▶

당시 경찰은 화성에 살았던 20대 남성 이춘재를 용의선상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화성에서 강력 범죄를 저질러 재판까지 받고도 수사망을 피했던건데, 어떤 허점이 있었는지 윤상문 기자가 알아봤습니다.

◀ 리포트 ▶

화성연쇄살인 사건이 잇따른 직후, 당시 화성 수사본부에선 작은 가능성도 놓치지 않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수사관] "태백에서 '화성'이 주소라고 하는 사람이 산에서 라면 끓여먹고 있다, 그래서 거기까지 출장을 가서 조사한 적도 있는데…"

하지만, 당시 핵심 수사관계자는 이춘재라는 이름은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합니다.

[하승균/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수사 책임자] "나는 그 이름 처음 들어요."

웬일인지 이춘재는 경찰의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빠져 있던 셈입니다.

그런데, MBC 취재 결과, 이춘재는 1990년 무렵 이미 강력 범죄를 저질러 처벌받았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번에 이춘재의 DNA가 검출된 9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 해입니다.

이춘재는 청주에서 처제를 살해한 혐의로 조사받을 당시, 자신의 전과를 털어놨습니다.

이춘재는 90년 4월 중순, 강도예비와 폭력 등의 혐의로 수원지법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연쇄살인사건으로 떠들썩했던 지역에서 강력범죄 전과자가 나왔는데도 제대로 수사받지 않았던 겁니다.

수사본부는 게다가 처제 살해범으로 이춘재가 화성 본가를 찾았을 때에도 직접 조사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당시 청주서부서 수사팀 형사] "공조를 안 했다는 이야기지."

원인은 당시 강력한 증거였던 용의자의 혈액형이 이춘재의 것과 달랐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강필원/국립과학수사연구원 과장] "피해자의 혈액형 물질이 많거나 또는 용의자의 혈액형 물질의 양이 많거나 서로 달라질 수가 있어요. 혼합된 상태로의 혈액형이 표현될 수도 있고."

경찰은 취재팀에게 이춘재의 또 다른 전과 사실에 대해선 확인해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출처

https://news.v.daum.net/v/20190921064606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