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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본적·주소·고향 모두 '화성 진안1리' 토박이. "1963년 화성서 2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나 1991년 결혼, 동네 구석구석 모르는 곳 없어"

류. 2019. 9. 20. 08:15



[앵커]

이춘재는 충북 청주에서 또 다른 성폭행 살인사건을 저질렀다가 체포돼 수감중 입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장소와 떨어진 곳에서 저지른 범행이어서 연관성을 찾기가 어려웠는데요. JTBC 취재결과 이춘재의 본적과 주소지는 모두 화성이었습니다. 사건이 두 차례나 발생한 곳에서 아주 가까웠습니다. 처음 교도소에 입감 당시 주소도 이곳으로 기재돼 있었습니다.

신아람 기자입니다.

[기자]

이춘재가 1994년 초 대전교도소에 수감될 때 등록된 본적은 화성 진안리, 지금의 진안동입니다.

집 주소 역시 진안동으로 등록돼 있었습니다.

본적과 주소지가 있는 진안동은 2차·6차 사건이 발생한 곳입니다.

또 이씨의 DNA가 확인된 5차, 7차, 9차 범행 장소와도 멀지 않습니다.

9차 장소는 집에서 불과 2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마지막 10차 사건은 화성에서 1991년 4월에 일어났습니다.

이씨가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살해한 건 1993년 12월이라 2년여 사이 주거지를 화성에서 청주로 옮긴 것입니다.

수사가 처음 시작된 건 1986년이라 추가 범죄를 저지르고 수사망을 피해 빠져나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JTBC 취재결과 처제 살해 사건으로 붙잡힌 뒤 교도소에서는 초범으로 관리됐습니다.

당시 이씨가 수사를 받았는지에 대해 경찰은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한편 혈액형이 다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청주에서 검거될 당시 확인된 이씨의 혈액형은 O형이지만 경찰이 밝힌 4차, 5차, 9차 사건의 용의자 혈액형은 B형입니다.


출처

https://news.v.daum.net/v/N3LNMEgsNB?f=p


"화성서 태어나 결혼, 동네 구석구석 모르는 곳 없어"


[화성 연쇄살인사건]
- 가족·이웃이 말하는 이춘재
모방범죄 뺀 9건 중 6건, 李가 살던 집에서 반경 3km 안에서 발생
청주 주민 "술 먹고 자주 때려 아내 가출.. 몽타주와 외모 비슷"
老母, 아들이 용의자로 확인된 사실 몰라 "지금도 죽지못해 산다"

"이춘재는 이곳 지리에 밝았다.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었다." 19일 경기 화성시 진안동에서 만난 주민들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확인된 이춘재(56)에 대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결혼도 했다"고 말했다. 과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였던 이 마을은 택지 개발로 인해 화성 사건 당시인 1980년대 후반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춘재를 알고 지낸 이웃 주민 일부가 여전히 거주하고 있었다. 진안동은 이춘재의 고향이고, 화성 사건의 범행 현장이기도 하다.

본지가 이춘재가 살았던 고향 마을과 사건 발생 장소를 둘러본 결과, 그가 부모와 살던 집터도 현재는 도로와 상가·빌라 등이 들어서 있었다. 이춘재의 옛 집터와 사건 발생 장소의 거리를 확인해보니 10건 가운데 모방 범죄로 범인이 검거된 8차 사건을 제외한 9건 중 6건은 모두 태안읍 관내로 그의 집에서 3㎞도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2차, 6차는 이씨가 살던 진안리의 농수로와 야산에서 피해자가 발견됐다. 이 두 사건의 증거물에서는 아직 이씨의 DNA가 검출되지 않았다.


이춘재의 어머니 김모(75)씨는 아들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로 확인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김씨는 19일 화성에서 본지와 만나 "걔가 워낙 착했던 애라 용돈 달라는 말 한 번 하지 않았다"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교도소에 있는 아들을 일 년에 두 번 면회 간다"며 "(아들이 교도소에 있어서) 지금도 죽지 못해 산다"고 말했다.


이 마을 원주민들에 따르면 이춘재는 1963년에 화성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논농사를 지었고 이춘재도 거들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형제로는 동생이 있었다. 그는 인근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전기 부품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화성 사건이 처음 발생한 1986년쯤에는 B씨와 결혼해 아들도 낳았다고 한다. 경찰이 증거물에서 이춘재의 DNA를 확인한 5·7·9차 사건은 이즈음인 1987~1988년 사이에 발생했다. 이 사건들은 범행 수법이나 발생 장소, 시신 처리 등이 비슷한 판박이 범행이어서 동일인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성폭행을 저지르고 목을 졸라 살해한 뒤 피해자의 속옷을 사용해 손과 발을 결박했고, 농로나 야산에서 시신이 발견된 점 등이 유사하다.

이춘재는 1993년 충북 청주로 이사한 뒤 살인 사건을 저질러 덜미가 잡혔다. 이듬해인 1994년 1월 13일 오후 충북 청주시 복대동 자신의 집에 찾아온 처제를 성폭행했다. 앞서 미리 준비한 수면제를 음료수에 타서 처제에게 먹였다. 성폭행 후 처제를 둔기로 때려 실신시킨 뒤 목 졸라 살해했다. 이어 집에서 880m가량 떨어진 곳에 시신을 버렸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은 "시신이 검은 비닐봉지와 청바지 등으로 싸여 철물점에 버려져 있었다"고 말했다. 처제의 시신은 집 근처 철물점 건물 뒤편 건축 자재 창고에 있었다고 한다. 시신을 발견한 당시 철물점 주인은 19일 본지 인터뷰에서 "(발견 당일 아침) 눈이 조금 내려 아내가 눈을 쓸러 나갔다가 천막 아래에서 시신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저를 불렀다"고 말했다. 공사에 쓰일 파이프 등을 쌓아 놓고 천막으로 덮어 놨는데 천막 아래에서 시신이 나온 것이다. 그는 "봄에 쓰일 자재라 천막을 덮어 놓았는데 평소 청소를 잘 안 하던 곳에서 우연히 시신을 발견한 것"이라며 "사건 발생 후 며칠 지났을 때였는데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춘재의 집 욕실에 대해 정밀 감식을 벌여 세탁기 받침대에서 피해자 DNA를 검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춘재가 범행 후 피해자의 혈흔을 씻는 과정에서 미량의 혈액이 남은 것이 결정적 단서가 됐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이춘재 아내(당시 24세)의 부모 등이 살았던 충북 청주시 흥덕구 주민들은 19일 "연쇄살인범 뉴스가 나온 뒤 마을 분위기가 흉흉하다"고 말했다. 한 주민은 "사위(이춘재) 키가 그렇게 크진 않고, 뚱뚱하지 않고 호리호리한 편이었다"고 했다. 경찰이 공개한 용의자 몽타주를 보고는 "제 기억으로는 거의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 이모(83)씨는 "이춘재에게 처제인 딸이 살해당한 뒤 그 집의 분위기가 아주 뒤숭숭했다"며 "현재 부모는 다 돌아가신 상태"라고 했다. 다른 주민은 "결혼한 후 사위(이춘재)가 별다른 직업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며 "딸이 직장을 다니며 생활비를 댄 것으로 안다. 또 술을 자주 먹고, 자주 다투고 딸을 때려 (딸이) 집을 나갔다는 말도 전해 들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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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사건때 경기청 강력계장 "후배들에게 무릎꿇고 절하고 싶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당시 화성에 거주했다면 당연히 경찰 조사를 받았을 겁니다."

화성 연쇄살인 용의자 행적 및 DNA 비교 분석 (서울=연합뉴스) 김영은 기자 =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A(56) 씨가 화성사건 발생 장소 일대에서 오랜 기간 거주한 뒤 이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성사건 이후 A 씨의 행적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화성사건 수사본부 전임관(수사총지휘자)이었던 정석준(81) 전 경기지방경찰청 강력계장은 20일 마침내 용의자를 특정해낸 후배 경찰관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이렇게 밝혔다.

정 전 계장은 2차 사건(86년 10월 20일) 후인 1986년 10월 29일부터 현장에 투입됐고 마지막 10차 사건(91년 4월 3일)이 끝난 뒤에도 96년까지 수사를 지휘했다.

정 전 계장은 이날 연합뉴스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흔히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만 화성 태안읍 진안리가 사건 발생 중심인만큼 수사는 그곳을 기점을 두고 이뤄졌다"며 "현재 특정된 용의자가 화성에 거주했다면 경찰 조사는 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사는 성별과 혈액형 가리지 않고 이뤄졌다"며 "다만 현재 언론에서 거론되는 유력 용의자의 이름은 기억에 없다"고 말했다.

화성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A(56)씨의 본적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현재 화성시 진안동)로 확인됐다.

A 씨는 이곳에서 태어나 1993년 4월 충북 청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계속 살았다.

청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주소지를 몇차례 바꾼 기록이 있지만 모두 지금의 화성시 일대인 것으로 전해졌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한 용의자가 경찰조사를 받는 모습 (화성=연합뉴스) 홍기원 기자 = 우리나라 강력범죄 사상 최악의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30여년 만에 특정됐다. 사진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A씨(오른쪽)가 1994년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한 뒤 살인한 혐의로 검거돼 옷을 뒤집어쓴 채 경찰조사를 받고 있는 모습. 2019.9.20 [중부매일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화성사건의 1차 사건 피해자는 1986년 9월 15일 발견됐고 마지막 10차 사건의 피해자는 1991년 4월 3일 발견됐다.

사건이 지속해 발생하는 동안 A씨는 화성에서 활동했던 셈이다.

정 전 계장은 A씨가 결론적으로 검거되지 못한 사실에 대해 "그때 팀을 270여명까지 데리고 있었고, 20여개 팀으로 나뉘어 부분부분 조사가 이뤄졌기 때문에 해당 지역을 맡았던 팀의 기록을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당시 범인은 B형으로 추정됐으나 유력 용의자는 O형이라고 하니 이 부분과 관련됐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 전 계장은 "청주에서 발생한 처제 강간살인은 장소와 대상 등 화성연쇄살인이라고 일컫는 범행 패턴과 다르다"며 "당시 수사본부가 청주 경찰에 'A씨를 데리고 와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있는지는 기억에 없다"고 설명했다.

정 전 계장은 "그동안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국민에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아왔다"며 "제가 무능해서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꾸준한 집념으로 쾌거를 이룬 후배들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고 싶은 심정이다"고 말했다.

용의자 A씨는 지금까지 이뤄진 경찰 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했다.

경찰 관계자는 "자세한 사안은 밝힐 수 없다"며 "가장 확실한 것은 용의자의 자백이므로 A씨를 상대로 조사를 계속 이어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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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잡았던 형사 "처제가 죽었다는데 무덤덤했다"


“가족까지 해서 주변 사람들 전부 조사했는데 딱 한 사람, 이춘재만 무덤덤하더라고요.”

20일 전화로 연결된 김시근(62)씨는 1994년 이춘재를 처제 살해 혐의로 체포했을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김씨는 사건 당시 청주서부경찰서(지금은 청주흥덕경찰서) 강력5반 형사였다.

알려진 대로 1994년 1월 이춘재는 ‘토스트기를 주겠다’며 처제인 이모(당시 20세)씨를 청주 복대동 집으로 불러들였다. 수면제를 탄 주스를 먹인 뒤 성폭행하고 살해한 뒤 800m 떨어진 철물점에다 버렸다. 김씨는 "시신을 비닐봉지와 스타킹 등으로 묶은 뒤 커다란 베개 껍데기 안에다 넣어뒀다”며 “어찌나 꼼꼼하게 쌌던지 피 한 방울조차 안 떨어지게 해뒀더라”고 말했다.

당시 김씨는 사건 현장만 보고도 곧바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떠올렸다. 화성에 있던 이춘재 집을 압수수색하면서 이런 내용을 화성쪽 경찰에다 알렸다. 하지만 수사 공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추가 수사는 진행되지 못했다.

수사 중 이춘재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한 건 김씨의 직감이었다. 그는 “가족 등 주변 인물 22명을 조사하는데 이춘재만이 유일하게 덤덤한 표정을 보였다”며 “48시간 넘는 조사 끝에 자백을 받아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건이 검찰과 법원으로 넘어가자 이춘재는 혐의를 부인했다. ‘강압에 의한 허위 진술’이라 주장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이춘재 사건을 맡은 사람이 이종기 변호사라는 점이다. 이 변호사는 대전지검 부장검사 출신으로 1990년대말 대전법조비리사건의 주범으로 처벌받은 인물이다. 이 변호사는 "이춘재와 부인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처제를 살해할 이유가 없다", "직접증거는 없고 경찰의 고문 때문에 허위 자백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당시 이춘재 집에서 논 다섯 마지기(1000평)를 팔아서 변호사 선임비를 마련했다고 들었다”며 "변호사가 말이 안 되는 주장을 많이 해 그 때 참 많이 싸웠다”고 말했다.

한편, 김씨는 이춘재가 화성에서 청주로 옮겨간 시기를 지금까지 알려진 1993년이 아니라 1990~91년 무렵으로 추정했다. 김씨에 따르면 이춘재는 건설현장 포크레인 기사였다. 일 때문에 청주를 오가다 건설회사 경리였던 부인을 만났고, 1994년 1월 사건 당시 만 두살배기 아이가 있었으니 1990~91년쯤에 청주로 생활근거지를 옮겼으리라는 얘기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추적 중인 경찰은 1991년 4월 발생한 10차 사건은 이춘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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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용의자, 10차 사건 직후 결혼..2년반 뒤 처제살해(종합)


범행 공백기간 가정 꾸리고 아내·2살 아들 상대로 폭행·학대

(서울·수원=연합뉴스) 김기훈 최종호 이영주 기자 =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A(56) 씨가 화성사건 발생 장소 일대에서 오랜 기간 거주한 뒤 이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성사건 이후 A 씨의 행적과 처제를 살해하기까지 3년에 가까운 공백기가 생긴 데 의문이 일고 있다.

A 씨는 화성사건의 마지막 10차 범행 이후 결혼한 것으로 확인돼 이러한 개인사가 범행 중단과 연관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A 씨의 본적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현재 화성시 진안동)로 모방범죄로 드러난 8차 범행을 제외한 나머지 9차례 범행이 모두 이곳으로부터 반경 10㎞ 안팎에서 발생했다.

A 씨는 실제로도 화성에서 태어나 30세가 되던 1993년 4월 충북 청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살았다.

화성사건의 1차 범행 피해자는 1986년 9월 15일 발견됐고 마지막 10차 범행의 피해자는 1991년 4월 3일 발견돼 A 씨가 화성에 거주하는 동안 모든 범행이 이뤄졌고 청주로 이사한 뒤에는 더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후 그는 이사한 이듬해인 1994년 1월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검거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현재까지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A 씨가 이 사건 진범이라면 10차 범행 피해자가 발견된 이후부터 처제 강간살인 사건 이전까지 2년 9개월이라는 공백이 발생한다.

일단 10차 범행 피해자 발견 이후 그가 청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2년 동안 화성 일대에서 실종되거나 살해된 채 발견된 여성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A 씨가 10차 범행 이후 사실상 범행을 중단한 것은 그가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A 씨는 1991년 7월 아내와 혼인신고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10차 범행 피해자가 발견된 지 불과 3개월 만이다.

아울러 처제 강간살인 사건 대법원 판결과 2심 판결문에 따르면 A 씨 아내는 결혼 이듬해 아들을 출산했다.

당시 법원은 A 씨가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동기로 1993년 12월 부인이 2살짜리 아들을 남겨두고 가출한 데 대한 극도의 증오감을 꼽았다. 1992년에 아들이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심야에 야외에서 이뤄지는 화성사건의 특성을 따져봤을 때 10차 범행까지는 독신생활을 하며 자유롭게 범행하다가 결혼 이후 중단한 것으로 점쳐진다.

이렇듯 A 씨의 범행 중단이 자발적이 아닌 결혼과 출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그는 이 시기 자신의 `살인충동'을 어떻게 해소했는지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A 씨는 이 시기 부인과 아들 등 자신의 가족을 상대로 폭행과 학대를 일삼는 등 가학적 행위로 이를 간접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판결문에는 A 씨의 아내가 가출한 이유가 그의 무자비한 폭행을 견디다 못했기 때문이라고 기재됐고 방 안에 가두고 마구 때리는 등 어린 아들을 학대하기도 했다고 적혀있다. 결국 아내가 가출하자 극도의 증오감을 갖고 처제를 상대로 범행했다는 것이 법원이 판단한 처제 강간살인의 범행 동기이다.

물론 10차 범행 이후 행적, 범행 공백기 등에 대한 의문의 가장 확실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인물은 A 씨 본인이지만 정작 그는 현재 화성 사건은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자세한 사안은 밝힐 수 없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용의자의 자백이므로 A 씨를 상대로 조사를 계속 이어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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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가 처제를 살해한 당시 청주 집 주소

https://u21design.blog.me/221652569433



희대의 강간살인마 이춘재의 살인게임희대의 강간살인마 이춘재의 살인게임


양의 탈을 쓴 악마의 두 얼굴 해부
잔혹한 연쇄살인마 이춘재(56)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두 얼굴로 살았다. 낮에는 ‘양의 얼굴’을 하고 밤에는 ‘늑대 얼굴’로 변했다. 평소 자신의 진짜 모습은 철저히 감추고 주변을 감쪽같이 속였다. 이씨의 ‘착한 평판’은 경찰 수사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보호막이 되기도 했다.

그의 외모도 경찰의 용의선상을 피하는 데 한몫했다. 이씨는 약 170cm의 키에 마르고 왜소한 체격이다. 계란형의 얼굴로 인상도 그리 나쁘지 않다. 여기에 피부는 뽀얗고 목소리는 중성을 하고 있다. 여느 연쇄살인마와는 차이가 있었다. 숱한 목격자와 몽타주까지 배포됐으나 정작 범인으로 지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숨은 얼굴’은 지역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물망처럼 포위하고 있던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살인 충동은 꿈틀거리는 생물처럼 일어났다. 특히 이씨는 ‘여자’와 ‘성(性)’에 집착하며 살인을 게임하듯 즐겼다.

이춘재의 살인행각은 상상을 초월했다. 화성 살인 사건 10건(8차 포함)을 비롯해 30여 건의 강간·강간미수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처제 강간살인 사건까지 포함하면 살인만 15건이다. 지역별로는 화성 10건, 수원 2건, 청주 3건이다. 모두 합치면 45건에 달한다. 살인 피해자의 연령은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게 분포됐다. 도대체 이춘재는 왜 악마가 된 것일까.


군 전역 후 나타나기 시작한 살인 충동

이씨는 1963년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현 진안동)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논농사를 지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이씨는 고등학교는 인근 수원의 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조용한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냈다. 말수가 적고 말썽 한 번 일으키지 않았다. 그와 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은 “투명인간 같았다”거나 “존재감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이웃들은 한결같이 “어른들한테 인사도 잘하고 성실했다”고 말한다. 가정환경도 특별나지 않았다. 이씨의 부모도 이웃주민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고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이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인 1983년 중순 군에 입대했다. 전차 조종수로 복무한 그는 군에서도 평범했고 특이점은 없었다. 1986년 1월 전역한 후에는 고향 인근 태안읍 안녕리의 한 전기부품 공장에 다녔다. 그의 살인행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군에서 전역한 지 8개월 만에 첫 살인을 저질렀다.

이씨는 1986년 9월15일 수원에 있는 딸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귀가하던 이아무개씨(여·71)를 목 졸라 살해했다. 이씨의 시신은 실종 5일 만인 9월19일 오후 하의가 벗겨지고 다리가 X자로 모아진 형태로 발견된다. 이후 이춘재의 살인행각은 처제를 강간 살해하고 검거된 1994년 1월까지 8년 동안 이어졌다.

화성 사건(1~10차)은 모두 주거지 인근에서 발생했다. 지름으로 따지면 반경 12km 안에 들어간다. 이 중 1·2·3·6차는 주거지에서 직장(태안읍 안녕리) 통근길이 무대였다. 지금까지 발생한 연쇄살인 대부분이 범죄자의 거주지나 직장 등 지리적으로 익숙한 거점 주변에서 발생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영철과 강호순도 범행 장소로 거주지 인근 지역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춘재는 상황에 따라 지역을 넘나들며 살인행각을 이어갔다. 그가 자백한 살인 사건을 날짜별로 보면 그의 범행 동선이 그려진다. 이씨는 화성 사건으로 세 차례에 걸쳐 당시 수사본부의 용의선상에 올랐다가 빠져나왔다. 1987년 5월에 발생한 6번째 사건 이후 처음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혐의 입증이 안 돼 풀려났다.

신분이 노출될 것을 우려한 이씨는 다음 범죄의 무대를 수원으로 옮겼다. 7개월 후인 1987년 12월24일 여고생 김아무개양(18)을 살해한 후 수원 화서역 근처에 유기했다. 피해자에게 재갈을 물리고 결박하는 데 속옷이 사용되는 등 화성 사건과 유사했다. 하지만 발생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별건 처리돼 미제사건으로 종결됐다.

이때 이춘재는 경찰의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수사망에서 벗어나자 자신감이 생겼는지 화성에서 7차(1988년 9월7일)와 8차(1988년 9월16일) 사건을 연이어 벌였다. 이씨는 1988년 말부터 1989년 4월 사이 두 번째 용의선상에 올라 경찰조사를 받았다.

그러자 다시 범죄 지역을 수원으로 옮겼다. 1989년 7월3일 수원시 권선구 오목천동에서 또 다른 여고생 정아무개양(17)을 살해해 야산 및 농수로에 유기했다. 이 사건도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화성 사건과 별개로 취급됐고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다.

약 2개월 후인 1989년 9월에는 수원의 한 가정집에 흉기를 들고 침입했다가 강도예비 혐의로 붙잡혀 구속됐다. 이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1990년 4월 석방됐다. 이춘재는 경찰에 붙잡히자 “모르는 사람에게 구타를 당해 쫓아가던 중 피해자의 집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범죄 패턴으로 볼 때 강도보다는 ‘성범죄’를 시도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1990년 초 이씨는 ‘화성 사건’ 세 번째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같은 해 11월 태안읍 병점리에서 귀가하던 중학교 1학년 김아무개양(14)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화성 9차 사건이다.

이씨는 1991년 1월부터 화성과 청주 공사현장을 오가며 일했다. 그의 살인행각은 청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해 1월27일 오전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 공사장 콘크리트관 속에서 방적공장 직원 박아무개양(17)이 숨진 채 발견된다.

지름 1m 콘크리트관 속에서 발견된 박양은 속옷으로 입이 틀어막히고 양손이 뒤로 묶인 상태에서 목 졸려 숨져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박양은 성폭행당한 뒤 목이 졸려 숨졌다는 소견이 나왔다.

사건 현장은 택지개발공사가 한창인 곳이었다. 주변에는 2.5m 깊이의 하수관로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기 때문에 평소 공사장 관계자 외에는 찾지 않는 곳이었다. 이에 경찰은 이 일대 지형에 익숙한 사람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무대 옮겨가며 살인행각 지속

당시 경찰은 3개월의 수사 끝에 박아무개군(19)을 유력 용의자로 체포했지만 법원이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무죄 판결하면서 미제로 남아 있었다. 5개월 후인 1991년 4월에는 화성에서의 마지막 살인인 10차 사건이 벌어진다. 주민 권아무개씨(여·69)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하다가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피살된 채 발견된다. 

이후 화성에서는 동일한 수법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언론은 연쇄살인이 멈춘 것으로 보고 온갖 추측성 보도를 쏟아냈다.

그러나 살인 무대가 바뀐 것에 불과했다. 1991년 7월 이춘재에게는 큰 변화가 생겼다. 청주 소재 건설회사의 굴삭기 기사로 취직하고, 얼마 뒤에는 회사에서 경리를 맡고 있던 이아무개씨(24)와 사귀다 결혼까지 했다. 이듬해인 1992년에는 아들까지 낳으면서 가정을 꾸리게 됐다.

이씨는 이미 살인에 중독돼 있었다. 결혼했다고 해서 습관처럼 몸에 밴 살인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들을 낳은 후 청주에서의 두 번째 살인에 나섰다. 1992년 6월24일 오후 청주시 복대동의 한 상가주택에 침입해 주부 이아무개씨(28)를 목 졸라 살해했다. 발견 당시 이씨는 하의가 벗겨지고 전화줄로 목이 졸린 채 숨져 있었다. 경찰은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사건 현장에서 나갔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했다. 피해자의 남편 등 주변인을 중심으로 수사를 폈지만 끝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다.

이춘재는 1993년 4월 아예 청주로 주소지를 옮겼다. 흥덕구 복대동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빌라를 얻어 가족이 함께 살았다. 하지만 얼마 뒤 다니던 건설회사가 부도나면서 아내의 벌이에 의지하는 상황이 됐다. 이씨 아내는 호프집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씨의 가정생활은 이전의 ‘착한 평판’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아내와 아들에게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을 행사했다. 동서가 있는 자리에서 아내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지고 손과 발로 피가 날 때까지 마구 때렸다. 어린 아들을 방에 가두고 폭행한 적도 있었다.

1993년 12월17일에는 아내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굴, 목, 아랫배 등을 때려 하혈까지 했다. 결국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한 이씨의 아내는 다음 날인 12월18일 두 살배기 아들을 두고 가출했다.

이씨는 아내를 증오하며 앙심을 품었다. 이씨는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오자 “내가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걸 알아두라”며 범행을 암시했다. 또 동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시는 결혼하지 못하도록 문신을 새기겠다”고 협박했다.

이씨는 아내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다가 대학교 교직원인 처제(20)를 성폭행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를 위해 1994년 1월13일 오후 처제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수면제를 먹여 성폭행했다. 범행이 탄로 날 것이 두려웠던 이씨는 처제의 머리를 망치로 4차례 내려친 후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

이씨는 성폭행, 살인,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2심은 사형을 선고했으나 대법원의 파기환송을 거친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씨는 1995년 부산교도소로 옮겨져 지금까지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이춘재는 교도소 안에서는 본모습을 숨기고 ‘착한 얼굴’로 지냈다. 24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징벌이나 조사를 받지 않았다. 교도소 측은 이춘재를 ‘1급 모범수’로 분류했다. 이후 냉난방 시설이 갖춰지고 냉장고까지 있는 방에서 편한 생활을 해 왔다. 손재주가 좋아 2011년, 2012년 수감자 도자기 전시회에 직접 만든 도자기를 출품할 정도였다.

영원한 비밀로 묻힐 것 같았던 이씨의 살인행각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수사에 덜미를 잡혔다. 경찰은 이씨의 범죄가 자백한 것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미제사건들을 모두 살펴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씨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해도 한국 범죄사에 ‘희대의 강간살인마’로 기록되게 생겼다. 

가학적인 변태 성향의 성도착증 

이춘재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며 ‘성범죄’와 관련이 있다. 범죄 키워드도 ‘성도착증’으로 집약된다. 이씨의 범행을 ‘성적 동기’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씨의 범행은 가학적이고 변태적이다. 피해자의 스타킹이나 속옷 등 소지품으로 손을 묶거나 얼굴에 뒤집어씌웠다. 옷을 모두 벗기거나 하의를 벗긴 후 다리를 격자 형태로 묶어놓기도 했다. 또 살해 후 시신을 크게 훼손했다. 성폭행만으로는 성적 쾌감에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씨는 결혼생활 중에도 성적 집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4년 1월 처제 강간살인 사건 후 이씨의 아내는 경찰에서 “남편이 폭력 성향과 성도착증이 심하다”고 진술했다. 전문가들은 이씨에 대해 ‘성도착증을 지닌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보통 ‘성도착증’을 가진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특정한 계기가 있게 마련이다. 성장기에 성적 학대나 성폭행을 당했거나 비정상적인 성관계 등 성 개념이 잘못 형성됐을 때 영향을 준다. 하지만 이춘재의 성장기에는 이를 의심할 만한 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씨의 가족과 이웃들은 양육 과정에서 학대나 방임 등은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군 복무 중에도 성추행이나 성적 학대를 당하거나 이와 관련해 문제가 야기된 적도 없다. 다만 경찰은 이씨로부터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성관계를 가졌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교도소 안에서도 성적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그가 교도소 사물함에 음란물로 보이는 여성 사진 10장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교도소 안에서 음란물 소지는 금지돼 있고 규정 위반이다. 1급 모범수인 이춘재가 위험을 무릅쓰고 음란물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성적 욕망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씨의 성도착증 형성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기 양육 환경을 더 분석해 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특히 청소년기에 잘못된 성적 환상을 키우는 경험을 했을 것으로 내다봤다. 


출처 : 시사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