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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5 [이슬람 극단주의 광기 공포와 슬픔의 현장] <2>쿠르드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의 인터뷰

류. 2019. 10. 14. 13:02


 2015.01.05[이슬람 극단주의 광기 공포와 슬픔의 현장] <2>쿠르드 참전용사들과의 인터뷰①



한국전에 참전했던 쿠르드족 노인 케말 압데가 이슬람국가단(IS)과의 전쟁에 한국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1950년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터키군은 1950년 10월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1만4천936명을 한국으로 파병했다. 이는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 규모의 참전 병력이었다. 한국전에서 사망한 터키군은 765명이고, 부상자는 2천147명, 행방불명된 사람은 175명, 포로는 346명, 비전투 요원 손실은 346명, 부산 유엔묘지에 안치된 유해는 462구이다.)



필자는 터키와 시리아가 국경을 접한 코바니 부근으로 전쟁을 취재하려고 갔다가 그 지역의 쿠르드인들로부터 아주 충격적인 정보를 들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병사들 중에 60%가 쿠르드인들이었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만은 없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쿠르드당의 간부였고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몇 년 전에 작고한 쿠르드 참전용사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근거까지 제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는 코바니의 국경지대에 갔다가 그곳에서 코바니에서 싸우는 쿠르드 젊은이들을 응원하려고 나온 한 청년(에르한 투란)을 만났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했던 첫마디가 바로 “나의 삼촌(메흐멧 투란)은 한국전에 참전한 용사였다”는 말이었다. “이미 6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삼촌이지만 살아있을 당시에는 언제나 한국에 대해 자랑스럽게 얘기했다”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한국인들이 터키를 형제국가로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6`25전쟁 때 세 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견해서 피를 흘렸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터키가 보낸 군인 중 많은 군인이 쿠르드민족으로 이뤄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쿠르드민족은 4천만 명의 인구가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네 개 국가에 집중적으로 나뉘어 살고 있다. 터키에만도 터키 전체인구의 25%인 2천만 명 이상이 쿠르드인으로 이뤄져 있고 지금도 터키의 동부지역에 대다수 인구가 집중해서 살고 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땅인 이 지역에는 역사적으로 수천 년 전부터 쿠르드민족이 살아왔다. 지금은 사실상 터키의 식민지로 쿠르드민족의 고유한 문화적 권리가 철저하게 탄압받아 왔고 터키의 깃발 아래 모든 역사적 사실이 묻혀 왔다. 당연히 한국전에 참전해서 피를 뿌렸던 쿠르드 용사들은 터키의 깃발 아래 모든 게 묻혀버렸고 영광은 터키가 독차지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필자는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군의 60%가 쿠르드 용사들로 이뤄졌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한국전에 참전했던 쿠르드 용사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곧 가지안텝시에서 소식이 날아들었다. 한 쿠르드인이 한국전에 참전했던 쿠르드 참전용사를 알지만 몇 년 전에 세상을 등졌다는 것이다. 필자는 살아있는 쿠르드 참전용사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전쟁이 한창인 코바니시의 맞은편 도시 수르츠시에 와서 쿠르드인들로부터 쿠르드인 대부분의 수명이 65세를 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 참전용사를 수소문하는 일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최연소자라 가정해도 80세가 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쨌든 수르츠지역에 머물면서 한국전에 참전한 쿠르드 용사를 찾는다는 말을 계속 퍼뜨렸다.



며칠 뒤 변호사인 일리야스 바란에게서 갑작스러운 희소식이 들렸다. '찾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살아있는 참전 용사를 두 사람씩이나! 사실 바란이 찾아낸 쿠르드 용사들은 모두 열 명이었으나 여덟 명의 노병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리고 대도시인 우르파시에서도 약사인 손자가 자신의 할아버지의 한국전 참전을 기리려고 약국 간판을 ‘코레약국’이라 붙여놓았다는 소식도 가져왔다.



1. 케말 압데


쿠르드인 변호사 바란이 찾아낸 쿠르드 노병은 마을 이름만 있고 번지수도 제대로 없는 농촌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마을 이름과 노병의 이름만 들고서 우리 일행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우리 일행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코레아”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금방 눈치를 채고 맞은편에 있는 참전용사의 집을 가리켰다. 허름한 시골집으로 들어서니 팔순이 돼 보이는 용사의 아내가 우리 일행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는 그의 젊었을 때의 사진과 훈장, 메달을 보여줬다. 낡은 메달에는 여전히 선명하게 'KORE'(코레`한국)라는 글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밭에 나가서 일하고 있는 그를 마을 사람이 달려가 불렀는지 금방 집으로 돌아왔다. 노병은 대문에 들어서면서 필자를 보자마자 “영등포!”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여든 살의 나이에도 그의 행동거지나 목소리는 청년이나 다름없었고 여전히 왕년의 군기가 살아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내 웃었다. 일행은 영문도 모른 채 나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영등포와 서울, 인천, 부산”을 다시 힘차게 외쳤다. 6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이 말들은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살아있었다. 한국인인 나를 보자마자 그동안 가슴속에 쌓여있던 한국이 터져 나온 것이다. 또 다른 한국말을 기억하는지를 묻자, “이리 와!”라는 말을 외쳤다. 내가 통역을 하자 좌중은 다시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의 이름은 ‘케말 압데’(터키식 이름은 케말 하이마제)이며 1932년생이다. 곧 그는 그의 아내가 들고 온 두 개의 한국전 참전 기념메달을 가슴에 달았다. 잠시 후 그와 60년이 지난 과거로 여행하기 시작했다. 한국사람으로는 필자를 처음 대한다면서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렇게 잘산다는 한국에서 지금까지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다”면서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현재 전쟁 중인 코바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당장 코바니로 달려가서 싸울 텐데, 늙은 게 죄다. 지금 코바니에서는 쿠르드 젊은이들이 인류의 적인 이슬람국가단(IS)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지만, 어느 나라도 제대로 지원해 주지 않고 있다. 많은 쿠르드 병사들이 전쟁 때 한국에 가서 희생하면서 한국을 지켜줬는데 왜 한국은 쿠르드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나? 지금 쿠르드민족은 한국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는 어렸을 때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단지 쿠르드어만 할 줄 알았지 터키말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18세가 되자 터키의 법에 따라 터키군에 징집될 수밖에 없었다. “터키말은 한국에 가서 배우기 시작했다”면서 터키말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을 터키군에 징집한 터키정부를 맹렬히 비난했다.



“터키의 ‘볼루’시로 징집돼 군사훈련을 3개월 받다가 한국으로 보내졌다. 당시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우리에게 한국전에 참전하는 데 동의하는지를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고 강제적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처음 한국에 보내질 때만 해도 우리 부대의 쿠르드 병사들은 거의 터키말을 할 줄 몰랐고 터키말은 한국에 주둔하면서 배우기 시작했다”는 놀라운 사실도 밝혔다. 케말과 함께 “거의 6천 명의 병사들이 보내졌는데 당시 대부분이 쿠르드 병사들이었고 10% 정도만 터키 병사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케말을 비롯한 쿠르드 병사들과 터키 병사들은 부산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훈련을 다시 받았다.



출처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374848



2015.01.12 [이슬람 극단주의 광기 공포와 슬픔의 현장] <3>쿠르드 참전용사 인터뷰②-야스메 이세(비르단)



케말 압데와 그의 쿠르드 동료들은 1953년 초 한국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고,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무렵 한국에 보내졌다. 당시 38선을 사이에 두고 상호 간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북한군이 내려와 부대 막사를 14동이나 불태웠던 침공이 있으면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쿠르드 병사들을 모질게 구박하던 중대장인 터키 장교를 죽이려고 모의를 한 사실도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터키 장교의 이름인데 레샤프, 우리 쿠르드 병사들을 너무 모질게 구박해서 그를 죽일 모의까지 한 적 있었다. 중대원 100명 중 쿠르드 병사가 90명이었고 터키 병사는 10명이었다. 터키 장교는 우리 쿠르드 병사를 눈엣가시처럼 차별했고 우리의 분노는 폭발 일보 직전까지 갔다. 레샤프는 터키 병사들에게서 들었는지 이 사실을 알아채고 아예 부대를 이탈해 도망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일도 있었다." 당시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그는 한 번씩 "영등포, 서울, 부산"을 습관처럼 외쳤다.



케말이 겪었던 가장 힘들었던 일은 바로 터키말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었다. "당시 우리 부대에는 대부분의 병사가 쿠르드인들이었기 때문에 터키말을 배울 기회나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터키인 장교들은 우리가 터키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항상 구타와 고문을 일삼았고, 심지어는 우리의 머리를 밀어버리기까지 하는 처벌을 내려 우리를 매우 화나게 하였다."



그는 휴전이 성립되고 나서도 2년 더 주둔하다 1955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돌아올 때 터키군은 그의 손에 메달 두 개만 달랑 쥐여줬을 뿐 월급은 물론 아무런 포상도 없었다. 그 뒤로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한국의 모습을 물었다. "당시 한국은 너무 가난하고 비위생적이어서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 주는 물조차 마시지 않았고, 도리어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빵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정말로 순박했고 마음이 따뜻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장례식 행렬에서 '아이고'라는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회상을 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3>쿠르드 참전용사 인터뷰②-야스메 이세(비르단)



쿠르드족 노인 야스메 이세가 한국전 참전 메달을 보여주며 한국에 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메소포타미아 광야를 10분 정도 달리다 보면 지척에 보이는 코바니는 포연이 자욱하게 싸여 있지만 양과 염소들, 쿠르드 목동들의 고함 소리는 잠시나마 전쟁의 공포를 잊게 한다. '쿠레무사'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서니 지팡이를 짚고 '케피예'를 머리에 두른 한 노인이 마을 어귀에 앉아 있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용사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힘없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앉아 있는 노인은 중동세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아랍 노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음미하는 듯 석양이 지는 서쪽 하늘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노라면 인생의 무상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 일행이 그에게 "코레"라고 외치자 어디서 갑자기 기운이 솟았는지 금방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코레'라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너무도 쉽게 역전의 용사를 찾아낸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우리 일행을 보자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고 기운을 되찾은 듯했다. 곧이어 그의 가족들이 몰려나와 의자를 가지고 나오고 차를 데워오면서 금방 자리가 만들어졌다. 조금 있으니 그의 아들이 한국전쟁 참전 메달을 가지고 나왔다. 유엔의 상징이 새겨지고 'KORE'(코레`한국)라고 새겨진 메달로 이전에 케말이 가슴에 달고 있던 메달과 같았다.



야스메 이세(1932년생, 터키식 이름 야스메 비르단)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국으로 보내졌다. 터키 제2의 대도시 '이즈미르'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중에 갑자기 한국으로 보내졌다. 당시 그는 8소대 소속으로, 소대원은 50명이었는데 21명이 쿠르드 병사들이었고 29명이 터키 병사들이었다. 한국에는 한국전이 끝나던 해인 1953년 초부터 1954년 초까지 1년을 주둔하다 돌아왔다.



야스메는 쿠르드의 시골 마을에 살면서 어릴 때부터 양과 염소를 돌보는 일을 했고, 도시에 있는 학교까지 갈 형편이 되지 않아 아예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당연히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터키말은 전혀 할 수 없었고, 터키어는 터키군에서 배울 수 있었다. 물론 터키 병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배웠지만, 터키어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인 한국으로 가기 싫었지만 개인적으로 전혀 반항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의 여행은 길고 험난했다. "터키에서 한국으로 배를 타고 24일 동안 밤낮으로 항해한 후에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다"고 말했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의 한국은 너무 못살았다는 것이다. 당시 너무 가난해 군인들이 행진하는 길 양편에 늘어앉아 음식을 구걸하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터키 빵을 '찹찹'이라고 부르면서 구걸했다는 것이다.



야스메가 투입됐던 한국전의 상황은 상당히 치열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획득하기 위한 전투는 상당히 격화된 상태였다. 야스메는 터키 여단이 휴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중공군과 치른 전투에 투입됐다. 야스메가 싸웠던 전투를 일명 '네바다 전투'라고 한다. 중공군은 터키 여단이 확보하고 있던 네바다 전초(前哨)를 1953년 5월 28일 야간에 2개 연대를 교대로 투입하여 공격하였다. 이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터키 여단은 다섯 번이나 '베가스' 고지를 점령당했으나 역습으로 다섯 번 다 그곳을 되찾았다. 그러나 네바다 전초 중에서 '카슨' 전초는 상실하였으며 '엘코' 전초는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여단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격전을 치렀으나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사단이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낼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네바다 고지'에서의 철수를 승인함에 따라 여단은 이 전초에서 철수하였다. 야스메가 소속된 부대에서도 상당수의 전사자가 나왔다. 그는 죽지 않고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지만, 그와 함께 싸웠던 부대원 중 많은 수가 죽어갔다. 이 얘기를 하면서 야스메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옛날 함께 싸우다 죽어갔던 쿠르드의 전우들이 생각나는지 눈에서는 이슬처럼 눈물이 맺혔다.



당시 든든한 힘이 되어줬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와 함께 한국전에 참전했던 동향의 친구들이었다. 같은 고향인 수르츠 지역에서만 8명의 쿠르드 병사가 한국전에서 함께 싸웠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고향 친구인 '살리 카도'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터키군에서 제대한 후에 한국 여인과 결혼해 한국에서 살다가 8년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당시에 무엇보다도 나를 화나게 했던 일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우리 병사들의 월급을 한 달에 80달러로 알고 있었는데 다 떼어먹고 5달러만 지급했다. 당연히 나머지 75달러는 터키군 지휘관들이나 장교들이 모두 도둑질해 먹었다"고 언성을 높였다. 당시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고 월급마저 뺏긴 일은 팔순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는지 이 얘기를 할 때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한국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었다. "제발, 우리 쿠르드민족의 피를 잊지 말았으면 하는 부탁을 드린다. 난 지금도 한국의 어디에서 싸웠는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수많은 쿠르드 친구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해요.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금 발전하게 된 초석에는 우리 쿠르드 민족의 피도 함께 배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출처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375824



2015.01.19 [이슬람 극단주의 광기 공포와 슬픔의 현장]<4>쿠르드 참전용사 인터뷰③



한국전에 참전했던 쿠르드 용사 '할릴 테멘'. 그는 2012년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태멘의 이야기를 전해준 쿠르드 기자.


한국전에서 싸웠던 쿠르드 용사 ‘할릴 테멘’은 2012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비록 필자는 테멘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를 만나서 인터뷰한 사람이 있다. 바로 용감한 쿠르드 기자다. 그의 이름이나 신상은 지면에서 밝힐 수 없다. 쿠르드 기자는 할릴 테멘이 작고하기 5년 전에 그를 인터뷰했지만, 언론에 대한 탄압이 야만적인 터키에서 이 같은 기사를 출판한다는 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라 적당한 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쿠르드 기자는 테멘에 관한 기사와 사진들을 7년이나 깊이 숨겨뒀다가 필자를 만난 뒤에 사진과 기사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코바니를 절반 이상 차지한 이슬람국가단(ISIL)에 맞서 열악하게 무장했음에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쿠르드민병대의 저항정신은 전 세계인들의 격찬을 받아왔다. 미국의 공습지원을 받으면서 쿠르드전사들은 이슬람국가단을 조금씩 밀어내왔고 지금은 75%의 코바니땅을 수복했다고 코바니의 전투 지휘부가 필자에게 전해주었다. 쿠르드인들의 끈질긴 저항정신은 수천 년 동안 다져지고 단련돼 온, 민족의 체화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중세시대 때 십자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탈환해 명성을 떨쳤던 쿠르드출신의 맹장 ‘살라하딘’은 지금도 쿠르드 용사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회자되고 있다.



쿠르드족 출신의 한국전 참전 용사 할릴 테멘에 따르면 그가 자라서 용감한 전사의 상징이었던 살라하딘을 본받기를 원했던 그의 어머니는 그가 터키군에 입대하기를 권유했다. “남자가 되려면 군에 가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면서 자랐던 테멘은 18세가 되자 터키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용감한 살라하딘의 후예가 되려고 한국전에도 자발적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1952년에 이즈미르(터키의 두 번째 대도시)의 군부대로 자진해서 입대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터키말을 배워 터키군에 입대했어도 언어에서는 큰 문제는 없었다. 군부대에서 훈련을 받던 중 터키장교 한 명이 훈련병들에게 한국전에 참가하기를 권유하는 연설을 했고, 연설에 강한 감동을 받은 테멘은 즉석에서 한국전에 참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훈련부대에서 쿠르드 병사로서는 일 순위로 자원해서 한국전에 간다는 서약을 했다. 그의 자원서약은 다른 쿠르드 병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한국전에 참전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자 75명의 쿠르드 병사들이 그를 따라 손을 들었다는 것이다. “쿠르드인들은 용감하고 싸우는 방법을 잘 알지만, 터키인들은 잘 모른다”라는 연설을 하면서 동료 쿠르드 병사들의 한국적 참전을 권유했다고 한다. 참전하기로 서약한 뒤부터 4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모두 5천500명의 병사가 한국전에 참전하려고 함께 훈련을 받았고, 곧 한국으로 보내졌다고 회상했다.



“이때가 1953년이었는데 대부분 병사는 쿠르드인들이었다. 다른 쿠르드 병사들의 참전 동기는 잘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한국전에 참전해 싸우는 이유가 명백했다. 쿠르드민족과 종교, 그리고 영예를 위해서였다.”



한국으로 가는 여행길은 멀었다. 3천500명의 병사를 실은 배가 이집트의 수에즈운하를 지나 한국으로 향했는데, 수에즈에서 한국으로 향하던 1천 명의 캐나다 군인들이 올라와서 함께 여행했다. 거의 25일 동안 육지는 전혀 보지 못하고 계속 여행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가는 도중 바다 한가운데서 터키로 돌아가는 군인들을 실은 배를 만나 배가 잠시 멈춰 섰는데, 이때 바다를 사이에 두고 돌아가는 쿠르드 병사들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돌아가던 병사들이 하는 말은 엄청난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너희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긴 알고 가나? 너희들은 지금 죽으러 간다. 우린 운이 좋아 살아있지만….” 이들은 우리를 향해 “한국으로 가지 말고 되돌아가자!”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렇다고 배의 항로를 되돌릴 수도 없었고 다른 배로 갈아탈 수도 없었다.



마침내 길고 긴 항해 끝에 파김치가 된 병사들은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내리자마자 훈련이 시작됐다. 훈련 중에 다섯 명의 쿠르드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에는 신무기였던 미국산 대포를 쏘는 훈련을 하던 중 오발로 말미암은 사고로 다섯 명의 쿠르드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이들이 죽은 뒤 훈련은 더 엄해졌고 훈련이 끝나자마자 바로 미군 군복과 무기를 지급받고 전투지로 보내졌다.



전투는 그의 상상을 넘을 정도로 격렬했다고 기억했다. “우리는 중국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는데 중국 군인들은 총도 없이 우리를 향해 몰려왔다. 중국 병사들을 향해 계속 사격을 했고 이들은 우리 눈앞에서 쓰러져갔지만, 이들의 숫자는 줄어든 게 아니라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전투를 하는 도중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손에서 총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15일 밤낮으로 전투했고 한 달 후에야 전투가 끝났다. 그 뒤 두 주 동안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휴전이 시작됐고 한 달 후에 다시 3개월의 휴전이 이어졌다. 내가 기억하기에는 와 함께 갔던 5천500명의 병사 중 많은 병사가 사망하고 4천800명의 병사만 돌아왔다고 기억한다.”



당시 테멘의 부대가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획득한 전과는 다른 군대들의 칭송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당시 미군들은 우리 터키 병사(사실은 쿠르드 병사들)들을 ‘영웅적인 병사들’이라고 칭하면서 치켜세웠고, 터키 군인들까지도 ‘동부지역 사람들’(쿠르드 사람들)은 용감하다면서 우리 쿠르드 병사들을 칭찬했다.”



테멘의 기억으로는 “한국전에서 지급된 무기나 용품들은 모두 미군들이 지급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1년을 더 주둔했고 총 14개월을 한국에서 보낸 뒤 돌아왔다.



한국에 대한 기억으로는 무엇이 남아있는가를 물었다. “당시 한국은 춥고 습도가 높아 우리 쿠르드인들이 생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인상 깊었던 모습은 장사하는 한국 사람들이 터키말을 배워 터키말로 장사하는 모습을 보고서 아주 놀랐다”고 테멘은 회상했다. 그리고 테멘의 기억으로 한국은 너무 가난했다. 당시 가난했던 쿠르드 병사들까지도 한국인들에 비해 부자라고 느꼈을 정도로 한국은 가난했다고 한다.



2005년도에 참전용사로 한국에 초청을 받아 한국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봤던 한국은 너무 부유했고 마치 낙원처럼 발전해있어서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게 가난했던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변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당시 나의 마음속에 들었던 생각은 우리 쿠르드 용사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할릴 테멘은 2012년 2월 4일에 ‘알리고르’에서 사망했다.



출처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376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