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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1187화. 이철규열사 변사사건, 앞뒤가 안맞는 검찰 발표(종합)

류. 2019. 10. 21. 10:33


'그알' 이철규 변사사건 미스터리, 앞뒤가 안맞는 검찰 발표(종합)






고(故) 이철규 변사사건이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10월 19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30년 전 조선대 교지 편집장이었던 청년 이철규의 사망 미스터리를 파헤쳤다.


지난 1989년 5월의 봄날, 광주 제4수원지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평소처럼 수원지를 돌아보던 관리인 최씨는 물가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최씨는 "개가 짖어서 가봤더니 죽은 사람이 있더라"고 말했다. 물에 빠진 시신을 숱하게 건졌다는 경찰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모습이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건 물론 온 몸이 퉁퉁 부어있어 신원을 확인하기 쉽지 않았다. 숨진 사람은 25세 청년 이철규. 그는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학생이었다.


이철규 어머니 황정자 씨는 "정신이 하나도 안 들었다. 덮어놓은 곳으로 가서 제쳐보니까 팅팅 불어서 얼굴 형체는 알겠는데 잘 몰라보겠더라. 어릴 때 아파서 작은 흉이 있는데 그게 눈에 들어왔다. 철규란 걸 분명히 알았다"고 회상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만큼이나 받아들이기 힘든건 마지막 순간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죽은 날짜도 모른다. 누가 밝혀줄 사람이 있을까"라고 말했다.


시신 발견 일주일 전인 5월 3일, 친한 친구들과 주스를 마신 후 생일파티를 위해 수원지 근처 산장에 간다며 오후 10시께 일어났다고 했다. 후배들을 만났던 카페에서 목적지인 산장까지 택시로 20여분. 하지만 11시가 넘어서까지 철규씨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만나기로 한 친구들은 "그날처럼 약속하고 안지킨건 처음이다"고 말했다. 이틀 뒤인 5월 5일 함께 놀러가기로 한 지인에게도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락이 끊긴 그가 돌연 숨진 채 수원지에서 떠오른 것이다.


물에서 건졌지만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기엔 너무 참혹한 상태였다. 유족과 지인은 의문을 풀기 위해 부검을 실시했다. 부검으로 찾은 사망 원인은 익사. 국과수는 사망에 이르게 할 만큼의 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 당시 국과수 부검의 이원태 씨는 얼굴이 까맣게 보이는건 물속에 오래 있어 부패가 심하게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라 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자살이 절대 아니라고 단언했다. 지인들은 이철규씨에 대해 "자기조절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후배들한테 좋은 것을 심어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사람이 그런 식으로 죽었다는건 맞지 않다", "말은 별로 없었지만 정이 많았다. 밥 굷고 다니는 후배들 보면 용돈이라도 주려고 했다", "외모도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카리스마 있고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또 그의 모습은 스스로 물에 뛰어든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의문을 품은 그의 선후배들은 이철규씨에 대해 추적했고 그날 이철규씨를 태운 택시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택시 기사에 따르면 수원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차를 막아섰다고 한다. 신분증이 없어 차에서 내려 신원조회를 받았다는 이철규씨. 경찰이 무전으로 이야기 하는 동안 그가 갑자기 산길쪽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또다른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경찰은 택시 기사의 증언이 나오기 전까지 그를 검문한 사실을 숨겼다. 경찰이 사건을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검찰이 사건을 수사했다. 시신 발견 20여일 후 검찰은 "수원지 상류 쪽으로 도주하던 중 수원지에 빠져 익사했다"고 발표했다. 검문 경찰을 피해 도주하던 중 생긴 불의의 사고라는 것이다. 그는 왜 경찰을 피해 도주한 것일까.



이철규 씨 후배는 "수배 상황이었고 1계급 특진에 현상금 300만원이 걸려있는 사람이었다"고 밝혔다. 이철규 씨는 당시 조선대 교지 편집장을 맡고 있었고 그 교지에 북한 관련 글을 실었다는 이유로 수배가 내려진 상황이었다. 1학년 수습기자 빼고 다 수배가 내려졌었다고 한다. 이철규 씨 선후배들은 이미 지명수배 대상자였던 이철규씨를 경찰이 택시 강도로 오해했을리 없다으며 이철규 씨를 쫓은 경찰이 다섯명이나 되었던 만큼 그날 경찰이 그를 놓쳤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참고

1989.05.13 [출처: 중앙일보] 범인체포 엄벌기대

미 국무부 변사논평

【워싱턴=연합】미 국무성은 12일 조선대생 이철규군 변사사건을 『개탄스러운 사건이며 잔악한 행변』라고 규탄하면서 범인이 체포돼 엄벌에 처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성명은 국무성 동아태국 대위인 실에서 발표했다.

성명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번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개탄스러운 사건이며 잔악한 행위다. 노태우 대통령이 철저한 수사를 지시한 점을 유의하며 살인자가 밝혀져 엄벌에 처해지기를 기대한다.』

이 대변인 실은 그러나 이 논평이 이군 변사사건에 대한 한국 수사당국의 수사결과를 사전 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330080




의문에 불을 지핀건 이틀만에 발표된 미국 국무성의 이례적 논평이었다.



참조 1989.5. 13 뉴스데스크

[미국 국무성의 이철규 군 변사사건 논평에 항의 지시]

● 앵커: 강영운 국무총리는 오늘 국무회의에서 조선대 이철규 군 변사사건과 관련해 미 국무성이 살인자가 조속히 밝혀져야 한다고 논평한데 대해서 진상을 조사하고 있는 과정에서 이 같은 논평이 나온 것은 유감이라고 말하고 최호준 외무장관에게 시정요구 등의 적절한 외교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한편, 외무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미국 측의 논평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하고 이 같은 우리 정부의 의사를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서 미 국무성에 전달했다고 밝혔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9/1822105_19354.html



검문 경찰의 증언에 따르면 이철규 씨는 처음에 저수지 반대편 산으로 올라갔다. 그런 그가 어떻게 산길 반대편 저수지에서 실족사를 했다는 것일까. 산길로 도주하던 이씨를 다섯명의 형사가 쫓아갔고 그 중 한명인 김반장이 다리를 심하게 삐어 다른 형사가 그를 부축하고 내려왔다. 두명의 형사 역시 산에서 내려와 주변 파출소에서 물을 마셨다. 산속엔 한명의 형사만 남았다. 이철규씨는 이틈을 타 산에서 내려와 도로를 건너 반대편 수원지로 향했다. 개구멍을 용케 찾아 수원지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쪽으로 150m를 이동, 발을 헛딛여 물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철규 씨의 죽음을 조사한 선후배들은 경찰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검문 받은 곳 쪽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경찰은 수원지 일대를 수색해 이철규 씨의 유류품을 찾았다. 찾아낸 점퍼에 찢긴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이 철조망을 통과하다 생긴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점퍼는 또다른 의문을 남겼다. 후배들은 "도망가는 마당에 왜 옷을 벗었을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추격전을 벌이던 사람이 옷을 벗고 도망갈 수 있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게다가 검문경찰이 주장했던 점퍼의 색깔이 발견된 것과 다르기도 했다. 경찰이 발견한 점퍼는 이철규 씨의 점퍼가 맞는걸까. 마지막 날 이철규 씨를 만난 지인들은 이철규씨가 그날 경찰이 발견한 것과 다른 색의 점퍼를 입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이철규 씨가 택시를 타기 직전 만났다는 의상학과 후배 이경미 씨정확하게 이철규씨가 입은 옷 색깔을 보여줬다. 그는 30년간 이 색깔을 잊을 수 없다.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말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그날 이철규 씨 옷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이경미 씨는 당시에도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옷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돌아온건 착각한 것이라는 반응이었다. 이철규 씨에게 옷을 빌려준 지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사건 당일 이철규 씨가 자신의 점퍼를 입고 나가는 걸 봤던 것일까. 집에 점퍼가 없었지만 입고 나가는걸 보지는 못했다며 "나중에 이게 검찰 쪽에 유리한 증거가 됐더라"고 말했다. 점퍼를 발견한 시점도 논란이 됐다. 시신 발견 됐을 때 없던 점퍼가 뒤늦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점퍼 외에도 유족과 지인들이 말하는 유류품이 뒤늦게 하나씩 나타났다.



당시 광주 4수원지는 폭도 좁고 수심도 얕았다. 뿐만 아니라 검찰이 주장한 실족 지점의 수심은 176cm였던 이철규 씨 키보다 낮은 1.6m였다. 게다가 이철규 씨가 익사할 만큼 수영을 못하지도 않았다.


검찰은 왜 이철규 씨가 그날 수원지에서 빠졌다고 판단한 것일까. 당시 수원지에 근무하던 청원경찰이 이철규 씨를 추격하던 경찰들을 돕기 위해 나왔다 풍덩 하는 소리와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수소문 끝에 소리를 들었다는 청원경찰을 만났다. 그의 당시 증언을 보면 물에 빠진게 아니라 헤엄치는 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강압적인 분위기에 자신의 생각을 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어떤 검사는 날 죄인 취급을 하더라. 억압을 줘가면서 조사도 하고"라고 말했다. 또 "개구리 수영이지만 건널 수 있는 거리다. 나도 개수영으로 건넌다. 동네 수영가지고도 건널 수 있다. 거기서 빠져서 죽었다는 것도 이해가 안간다"고 밝혔다.



부검시간 1989. 5 .11 11:05~11:50



당시 이철규 씨 지인들은 국과수의 부검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며 진상규명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부검을 참관했던 당시 의대생 김성중 교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며 울먹였다. 그는 "당시 내가 의학적인 식견을 많이 갖고 있지는 않은 상태였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일반인이 보기에는 참혹한 시신이었다. 국과수에서 하시는대로 지켜만 보는 분위기였다. 실제 이런 행위들이 진상을 규명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또다른 참관인 박태훈 의사"부검이 왜 이렇게 짧지? 생각했다. 의문사인 경우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처와 피하 출혈을 확인해서 고문, 구타 흔적을 세밀하게 식별해 나가야 한다. 내 느낌으로는 1~2시간 정도였던 것 같다. 굉장히 빠르게 진행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검은 1시간도 진행되지 않았다. 박태훈 씨는 "굉장히 살벌했다. 당시에는 말을 잘못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분위기였다"고 밝혔다.




당시 대책위는 미국인 부검의 로버트 커슈너 박사도 초청했었다. 부검이 끝난 후 대책위는 장례를 치르지 않고 시신을 옮겼고 커슈너 박사가 시신을 살펴보기로 했다. 정작 부검을 하기로 한 날 부검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검찰이 출국 정지 시키겠다며 그를 압박했다는 것. 오히려 더 큰 의혹만 남기고 떠났다.












대책위는 장례라도 치르기 위해 마지막 방법을 시도했다. 조선대학교 의대 교수들과 함께 이철규 씨의 장기를 채취해 보관한 후 장례를 치른 것. 보다 정확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해부 장면을 촬영한 뒤 영상을 보관해뒀다. 그런데 1-2개월 후 비디오와 보관한 장기가 사라졌다.


시신을 해부했을 당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걸까. 추모 카페를 찾은 제작진은 산더미 같은 자료 속에 가려져 있던 7통의 필름을 찾았고 총 300장의 사진을 확보했다.



법의학자들은 사진들을 본 후 익사의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부패가 심해 확신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구타가 의심될만한 상처들이 여러개 보인다는 의견도 나왔다. 공통적으로 나온 이야기는 돌 축대에서 추락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이곳에서 실족했다는 검찰의 주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철규 씨는 언제, 어디서 사망한 것일까. 당시 이철규 씨 위에서 콩나물, 시금치가 나왔다. 국과수는 이 음식을 사망 2시간 전에 먹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오후 9시께 먹었다는 것. 당시 이철규 씨는 카페에서 후배들과 주스를 마신 것이 전부다. 사건 당일 이철규 씨와 함께 식사한 후배는 짜장면을 먹었다고 했다. 이철규 씨 위에서 나온 콩나물, 시금치는 다른 날 먹은 음식일 수 있다. 이철규 씨가 검문을 피한 5월 4일 사망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이다. 후배들은 이철규 씨가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후 사망한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물고문 사망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물고문으로 사망해도 사인이 익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철규 씨가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에 조직된 대책위에게 수상한 장면을 목격했다는 수많은 제보가 도착했다. 제작진은 이 중 신빙성 높은 제보를 찾을 수 있었다. 5월 30일 대전의 기독교단체 사무실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제보자는 5월 3일 제보자는 수원지에서 누군가가 한 남성을 구타한 뒤 끌고가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당시 제보 전화를 받았던 최재준 씨는 "깡패들끼리 싸우는 줄 알았다더라. 나중에 보니 수갑을 채우더라는거다. 제보한 사람은 처음에 3명이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여자 목소리가 들리면서 4명이라고 하더라. 한명은 서있었고 세명이 무자비하게 때렸다. 나중에 하도 맞아서 그분이 '차라리 날 죽여라'고 했다. 자기가 애인을 만나러 간 날짜를 기억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혼자라면 지어낸 이야기였을 수 있지만 제보자는 애인과 함께 사실관계를 고쳐가며 증언했다고 한다. 직접 증언을 부탁했지만 제보자는 공무원이라 그럴 수 없다며 증언을 녹음한 파일을 주겠다고 했다. 최재준 씨는 "그때부터 이상했다. 검정 승용차 같은게 세대나 왔다. 건장한 청년들, 깍두기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들이었다. 같은 건물 회사 직원들이라며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제보자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인권위에 연락하는 과정에서 도청이 도지 않았나 싶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날 이후 제보자에게 어떤 연락도 없었다고 한다. 제보자의 증언에 신빙성을 높이는 증언이 있다. 이철규 씨를 태웠던 택시기사는 검문 현장에서 한 커플을 목격했다고 한 바 있다.


이철규 씨를 찾기 위해 수원지를 수색한 경찰 중 전남경찰청 대공분실 소속 경찰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30년 전 일이지만 그는 이철규 씨를 찾으러 갔던 당시 상황을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상황하면 미스터리다. 도망갈 만한 곳이 아닌데 거기서 시신이 발견됐다고 해서 이상하다 했다. 그 사람을 잡아서 특진할 사람은 있어도 그 사람을 죽여서 이익볼 사람이 누구냐"고 말했다.



대공분실은 간첩 수사를 담당하던 부서다. 그들은 왜 대학생을 잡기 위해 수색에 나섰을까.








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세상이 달라진 듯 했지만 노태우 정부가 들어오며 다시 공안 정부가 시작됐다. 민주화 운동을 막기 위해 공작이 필요했다. 당시 전남학생운동권의 리더였던 이철규 씨를 검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에 이철규와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은 경찰보다 윗선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철규 씨 담당 형사는 아버지에게 전화해 "잘못하면 큰 사건에 휘말린다"고 했다고. 간첩단 사건이 큰 그림으로 나왔다는 말도 나왔다. 이철규 씨를 간첩단으로 엮을만한 조직은 어디일까. 그의 선후배들은 안기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당시 안기부 광주지부장을 찾아갔다. 그는 "TV00 같은건 해도 SBS랑은 하고 싶지 않다. 당시 발표가 진실이다"며 인터뷰를 거부했다. 당시 검찰은 안기부가 정해줬다는 실족지점을 제기하며 실족사를 주장했을 뿐 다른 의혹은 수사하지 않았다.





















모두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진실이다. 30년간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두번이나 조사했지만 결과는 진상규명 불가였다. 당시 증거 자료에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나라에서 임명한 전문가들이었지만 정보기관에게 나라는 정부가 아닌 자신들이 속한 기관이었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캡처)




출처

https://entertain.v.daum.net/v/20191020002527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