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보복 한달](종합)上
[편집자주] 일본이 경제보복 포문을 연지 1달이 지났다.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 명단) 배제라는 추가보복이 임박한 가운데 핵심소재 수입이 전면통제된 재계는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대한민국의 현재이자 미래인 반도체를 위협하는 일본에 맞서 범국민적인 불매운동이 거세다. 미국이 뒤늦게 중재에 나섰지만 양국의 갈등이 어디로 향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관련 연쇄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3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태국 방콕으로 출국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9.07.31. /사진=뉴시스
파국일까 전환점일까. 일본이 대한국 반도체 수출규제를 발표한지 1일로 꼭 한 달이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하는 결정이 유력한 일본 내각회의(2일)는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바로 이 시점, 미국이 한일 양국에 ‘현상 동결 협정(standstill agreement)’ 이른바 휴전을 제의했다. 일본은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유지하고 한국은 징용배상 관련 일본기업 자산의 현금화를 막는 현상유지 방안도 거론된다.
31일(현지시간 30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고위 관리는 “미국이 첨단기술 소재 수출 등과 관련한 한일 간 외교적 분쟁에 대해 한일 양국에 ‘휴전 협정’에 서명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촉구했다”고 말했다. 이 관리는 “휴전 협정이 양국의 갈등을 해소하지는 못하겠지만 협상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추가 조치가 이뤄지지 않도록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미국 관리를 인용, "트럼프 행정부는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려는 움직임을 우려, 이를 각의에서 결정하지 말 것을 아베 정부에 요구했다"며 "한국에 대해서는 강제징용 소송 관련 원고(징용 피해자) 측이 압류한 한국내 일본기업의 자산 현금화를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미국은 이와 함께 수출규제를 논의하는 한미일 테이블을 만들 것을 제안한 걸로 보인다. 한미일 3각동맹을 흔들 수 없다는 위기감이 읽힌다.
이런 가운데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아시아안보포럼(ARF)을 계기로 한일, 한미일 외교장관 연쇄 회담이 열린다. 강경화 외교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1일 오전 양자회담을 한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태국으로 출발 전 기자들과 만나 한미일 외교장관회담을 갖는다고 밝혔다. 미국측 중재안과 ‘휴전협정’의 구체적 논의가 주목된다.
정부는 이와 별도로 ARF 의장성명 등에 ‘자유무역 지지’를 담는다는 복안이다. 일본의 보복을 보호무역 조치로 규정, 국제여론으로 포위한다는 것이다. 강 장관은 이날 인천공항서 기자들과 만나 “(일본의) 규제조치가 부당함을 분명히 지적하고, 이러한 조치가 중단돼야 한다고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무소속 서청원, 더불어민주당 김진표 의원 등 중진들로 구성된 국회 방일 의원단은 도쿄에서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의원연맹 회장을 만났다. 의원단은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을 하지말라는 뜻을 전하며 북한 미사일 발사 등 지소미아(GI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의 효용성도 거론했다. 양측은 무역 갈등이 양국 국익에 도움이 안된다는 인식을 같이했다고 서청원 의원이 전했다. 일본 집권 자민당의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과 우리 의원단 면담은 1일 오전 11시30분으로 연기됐다.
국내에선 여야 5당과 정부, 경제단체의 민·관·정 총력대응이 가동됐다. 기업들이 수입선 다변화, 설비증설에 적극 나서면 정부는 한해 1조원 이상의 R&D(기술개발) 지원은 물론이고 다각적 세제·금융 지원을 하는 방안을 강구한다. 정치권 또한 입법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부응했다.
이같은 전방위 노력도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막기엔 늦었다는 회의론이 있다. 외교부는 전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2일 (일본이)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내다봤다. 이 경우 국내 중소기업에 2차 피해가 이어지며 사태가 장기화할 수 있다.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이 2일 오후 열린다면 2일 오전 각의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정부대책에 국민들이 강하게 호응하는 데 주목한다. 국민들은 일본의 경제보복에 불매운동과 일본 관광 중단으로 맞섰다. 정부가 나서서 독려하기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자발적 참여가 정책·외교적 대응에 상당한 뒷받침이 된다는 판단이다. 부품·소재를 비롯 전반적 산업기반을 따져보게 된 것, ‘친일·반일’을 넘어 ‘극일’ 흐름이 만들어진 것 등도 의도치는 않았지만 나름의 성과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주 여름휴가 대신 정상출근하며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이날 청와대에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NSC 상임위원회의가 열려 일본이 상황을 악화시킬 경우 가능한 모든 조치를 포함, 단호히 대응할 것임을 밝혔다.
김성휘, 권다희, 김하늬, 김성은, 이상배 뉴욕특파원 기자
"아직까지는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없지만 일본에 목줄을 잡혔다는 게 문제입니다. 사전에 확보해둔 재고 물량을 최대한 아껴쓰고, 중장기적으로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소재·부품 수급 구조를 개선하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본의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규제로 '컨틴전시 플랜(예측하기 어려운 사태가 전개될 경우에 대비한 비상대책)'을 가동 중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31일 현장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가 지난 1일 무역보복 조치를 공식화하자 '반도체 생산 중단'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거론됐지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생산라인 상황은 한 달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규제 품목에 오른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소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수출 승인은 예상대로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각 사는 한·일 갈등 장기화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해법 마련엔 분주하다.
일본 수출 규제의 공격대상이된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을 중심으로 위기 극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부회장은 5박6일간 일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후 반도체 부문 최고경영진을 긴급 소집해 대응책 마련을 주문했다. 이어 가전과 모바일 등 전 사업부문에 비상경영을 지시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수입선 다변화와 신소재 공정 테스트 등을 병행하면서 혹시 발생할 수 있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며 "고객들에게 일일이 서한을 보내 안심시키는 등 반도체 생산에 문제가 없다는 점도 적극 설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다. 이석희 사장과 김동섭 대외협력총괄 담당 사장 등 최고경영진이 일본을 방문해 반도체 원자재 수급 방안을 논의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재고 물량을 적극적으로 확보하고 공급처 다변화는 물론 공정에서 소재 사용 최소화해 생산 차질이 없도록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겉으로는 반도체 생산이 그대로 이뤄지고 있어 한 달 전과 바뀐 게 없어 보인다"며 "하지만 일본 업체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자리잡으면서 탈(脫)일본 움직임에 시동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 제품 품질이 좋아 당장 공급처를 바꾸는 것은 어렵겠지만 먼저 신뢰를 깨뜨린 만큼 수입선 다변화와 국산화가 불가피한 선택지가 됐다"고 덧붙였다.
최석환 기자
지난 한 달 동안 일본 내에서 주목도가 높았던 이벤트 중 하나는 참의원 선거다. 3년 만에 치러진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총재로 있는 자민당 및 자민당과 연립여당을 구성중인 공명당은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총 124명을 새로 뽑는 선거에서 두 정당이 71석을 획득했다. 다만 개헌선을 확보하는데는 실패해 '절반의 성공'이라 불린 선거전이었다. 일본 정부가 이번 수출규제 방안을 밝힌 것은 선거를 20여일 앞 둔 7월1일. 이번 선거전을 앞두고 보수 표결집을 위해 '한국 때리기'에 나섰다는 평가들이 잇따랐다. 아베 총리의 숙원 사업인 '전쟁가능 국가'로서의 일본을 만들기 위한 개헌을 추진하거나 소비세 인상, 노후자금 문제 등으로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분위기 반전 카드가 필요했다는 것.
지난 19일 고노다로 일본 외무상이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매우 유감" 또는 "지극히 무례"와 같은 거친 말을 쏟아낸 것도 막판 표몰이를 위한 보여주기식 행동이었단 해석도 나왔다.
이날 고노 외무상은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관련, 일본 측의 '제3국 중재위원회 설치' 방안 제시에 거부하자 곧장 담화를 발표했다. 담화는 한국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며 한국 정부가 이를 시정하지 않을 경우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압박을 담았다.
다만 일본 정부가 선거를 위해 한국 때리기에 나섰다는 관측에 대해 요미우리는 이번 규제조치가 지난 5월에 이미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발표 시점에 대해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G20 정상회의까지 만족할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한일 신뢰가 심각하게 손상됐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아베 총리는 선거 결과가 나온 직후 "한국 측이 한일 청구권 협정에 위배되는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은 정말 유감"이라며 "한국 측이 답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건설적 논의가 안된다"고 인터뷰했다. 또 지난 22일 자민당 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아베 총리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했으나 약속을 준수하라"고 엄포를 놓아 선거가 끝난 후에도 한국에 대한 강경 대응 기조는 계속될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면서도 일본 정부는 막상 한국과 대화의 장에 나오는 데는 소극적인 상황이다. 지난 29일 산케이신문은 9월 UN총회에서의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간 정상회담은 사실상 무산됐다고 전했다. 수출규제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일본 경제산업성도 지난 12일 도쿄에서 실무자급의 '양자협의(일본 측은 설명회라 주장)'를 가진 것을 제외하고 '대면의 장'에 나서란 한국 측 요구에 지속적으로 응하지 않고 있다.
한편 일본 정부는 이르면 오는 2일, 각의를 개최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수출규제 2탄' 격인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내용을 담은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통과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져 이날을 기점으로 한일 관계는 다시 한 번 중대 분수령을 맞을 전망이다.
김성은 기자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398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 참석한 아이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대한민국의 7월 한 달이 '반일 시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지막 날인 31일 갑작스러운 폭우도 서울 도심 곳곳에서 울려 퍼진 '아베 규탄' 목소리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이날 정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소녀상 앞에서는 여느 때와 같이 수요집회가 열렸다. 제1398차 수요집회에 모인 800여명(주최 추산)은 한목소리로 "일본 정부는 공식 사죄하라"고 외쳤다.
오전부터 시간당 20㎜가 넘는 집중호우가 내렸지만 평소를 훌쩍 웃도는 인원이 수요집회를 찾았다. 이달 초만 해도 수요집회 참석 인원은 200~300명에 그쳤지만, 반일 감정이 격화하며 점차 참석자가 늘었다.
집회 중간중간 소나기가 내려도 참석자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과거를 인정해야 미래도 존재한다',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 등 피켓도 손에 들었다.
자유발언에 나선 경기평화나비네트워크의 김아영 활동가는 "최근 아베 정부가 사과는커녕 경제보복, 수출규제 심지어 화이트리스트에서도 제외하겠다고 말했다"며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보복이기 때문에 분노한다"고 말했다.
전남 장흥중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문광민 군도 "일본 정부의 뻔뻔한 태도에 화가 난다"며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낼 때까지 이 분노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같은 시각 중학동 일본대사관 건물 앞에서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1인 시위가 진행됐다. 릴레이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는 정도영씨(54)는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에 책임 의식을 느끼고 사죄를 하기는커녕 경제보복으로 대응한 데 대한 자연적 분노로 나왔다"며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려고 한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일본 정부의 반도체 부품 등 수출규제로 시작된 반일 시위는 날이 갈수록 규모화·조직화하고 있다. 소녀상과 일본대사관 등지에서 1인 시위 위주로 진행됐던 반일 움직임은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민중공동행동 등 시민단체는 지난 20일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역사왜곡·경제침략·평화위협 아베규탄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이날 집회에는 1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욱일기를 찢는 등의 퍼포먼스를 했다.
일주일 뒤 27일에는 광화문광장으로 옮겨와 5000여명이 참여하는 2차 촛불 문화제를 개최했다. 이들은 광복절까지 총 다섯 차례의 집회를 예고하고 있다. 부산 등 지역시민단체와도 연계해 집회 규모를 전국 단위로 늘려 더 많은 시민의 참여를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민이 표현과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일본 정부나 기업에 대해 사회운동이라는 형태로 부당한 점을 알리는 것은 바람직하다"면서 "정부도 마냥 불을 붙이는 태도보다는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적 수단을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동우 기자
문희상 국회의장이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현안문제 논의를 위한 국회대표단 방일 관련 전문가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사진=홍봉진 기자 honggga@
추가경정예산안(추경안)을 100일 가까이 묵혀둘 만큼 평행선을 달렸던 여야가 오랜만에 목소리를 모은다. 일본 수출규제에 대응한다는 뜻에는 여야가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1일 구성한 일본경제보복대책특별위원를 중심으로 의원외교, 대외 여론전, 관련 입법 등에 힘쓰고 있다.
최재성 위원장을 중심으로 분과장·분과별 회의를 수시로 열고 있다. 특위는 수출규제가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과 기업 피해, 사태 장기화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지원대책 등을 논의했다. 특위는 명칭에서 '보복'을 '침략'으로 바꿨다.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가 됐다. 일본에 대한 비판 강도를 높이겠다는 신호다.
대외 여론전에도 나섰다. 특위는 정부에 일본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원회에 회부할 것을 건의했다. 최 위원장은 "일본은 전략물자 통제능력이 없는 위험한 국가"라며 유엔 안보리 회부 필요성을 강조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국내 부품·소재 산업 지원을 위한 현장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6일엔 정밀화학소재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열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31일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국)에서 배제할 시 가장 높은 수준의 대응에 나서야 한다"며 강경대응을 예고했다.
민주당은 이날 별도의 소재·부품·장비·인력 발전 특별위원회를 발족했다.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 조치에 대비하기 위한 위원회다. 정세균 의원이 위원장을 맡았다. 특위는 일본 수출규제로 인해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마련됐다. 관련 산업과 인력을 육성하고 관련입법 지원에 나설 예정이다.
자유한국당은 일본 수출규제 문제에 한해선 '초당적 협력'을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국방·안보 문제를 두고는 날을 세우고 있다.
한국당은 지난 24일 일본수출규제대책특별위원회를 출범하며 정진석 의원을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정 의원은 "국익 우선 원칙을 견지하겠다"며 "국가 생존과 직결된 외교·안보 문제는 초당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24일 방한한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NSC) 보좌관과도 비공개회동을 가졌다.
다만 국방·안보 분야 공세수위는 강화했다. 최근 북한 목선 사건, 해군 제2함대 거수자 출연 사건 등이 발생했고, 23일엔 중국·러시아 군용기가 한국 영공을 침범했다. 한국당은 이를 계기로 정경두 국방부 장관 해임건의안 제출을 압박하고 있다. 결국 추경안 처리의 반대급부로 '안보국회'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여야는 22일 열린 외교통상위원회에서 일본 수출규제 철회 촉구 결의안 처리에 합의했다. 결의안은 1일 본회의에서 처리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달 1일 처리될 것으로 예상되는 추경안에는 일본 경제보복 조치 대응을 위한 예산이 포함됐다. 2731억5000만원 규모다. 국회는 30개 사업, 총 1조2224억8500만원을 정부 측에 제시했고, 정부가 이를 다시 검토해 국회에 최종 제출한 금액이다.
여야 5당 초당적 기구인 '일본 수출규제 대책 민관정 협의회'도 31일 출범했다.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가 청와대 회동에서 '정부와 여야는 범국가적 차원의 대응을 위해 비상협력기구를 설치해 운영하기로 한다'고 합의한 데 따른 조치다.
같은 날 오전엔 국회 방일 의원단이 일본 도쿄로 향했다. 수출규제 조치 철회를 요구하고, 한국의 화이트리스트(전략물자 수출 간소화 대상) 제외는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일본 의회 측에 전달하기 위해서다.
방일단에는 김진표 민주당·윤상현 한국당·김동철 바른미래당·조배숙 민주평화당·이정미 정의당·서청원 무소속 의원이 포함됐다.
김평화 기자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차 일본수출규제대책 민관정 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사진=홍봉진 기자
일본의 경제보복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체계'가 재조명받고 있다. 그동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은 가깝지만 먼일이었다. 대기업은 당장 상용화가 안 된다는 이유로 중소기업이 만든 국산 부품·소재를 외면하고, 중소기업은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국산화에 나서지 못했던 게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국가 간 무역갈등으로 생기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을 통한 부품·소재 국산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대기업이 지원하고 중소기업이 실행하는 방식의 상생협력 체계가 산업역량을 키우는 데 필수라는 설명이다.
31일 중소기업중앙회, 중견기업연합회 등 산업계와 정치권, 정부는 '일본수출규제대책 민관정협의회'를 열고 대·중소기업 상생을 통한 국산 부품·소재 개발이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부품·소재 중소기업들이 R&D를 강화해 신기술·신소재 등을 개발하면 구매처인 대기업들은 해당 기업에 대한 투자·구매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반도체 제조용 장비, 실리콘웨이퍼, 기타 개별소재 등 반도체 관련 품목 중 일본 수입 비중은 30% 이상이다. 일부 정밀 부품과 석유화학 수입 품목은 일본 수입 비중이 80~90%를 넘는다.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협력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모두가 납득했던 부분이지만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던 게 현실"이라며 "이번 위기를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상생 체계가 자리 잡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주장은 국내 중소기업이 99.99999999(텐나인)% 수준의 불화수소 생산특허를 취득하고서도 판로를 확보하지 못해 상용화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더욱 거세졌다. 문재인 대통령도 22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중소기업들이 국산화 기술을 갖추거나 제품개발에 성공해도 공급망에 참여하지 못해 사장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주무부처인 중기부를 중심으로 대·중소기업의 상생협력이 확산될 수 있도록 지원체계 정비에 나섰다. 지난 25일 발표한 '공공조달 상생협력 지원제도'가 대표적이다. 해당 제도는 중소기업이 공공기관과 먼저 조달계약을 맺고 물량생산 일부를 대기업에 역으로 하도급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시스템 반도체 등 핵심 부품·소재의 경우 최종 완성품 생산업체가 부품을 선택하는 구조여서 판로지원이 쉽지 않았다. 중기부는 제도 도입으로 부품·소재 분야 중소기업도 적극적으로 조달시장에 진출해 역량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중기부는 앞으로도 중소기업이 부품·소재 국산화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상생협력지원사업을 정비해나갈 방침이다. 중기부 관계자는 "기업들의 상생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기조하에 정책·사업들을 수정·설계하고 있다"며 "구매, R&D 등 다양한 분야의 상생협력지원제도를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하, 고석용 기자
19일 오전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연구원들이 차세대 반도체 연구를 하고 있다. 2019.07.19. /사진=뉴시스
일본의 무역보복 국면이 한 달째에 접어들었다. 국내 중소기업들은 아직까지 직접적인 피해를 호소하는 곳은 없지만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피해가 현실화 될까 우려하는 모습이다. '화이트 리스트'(안보상 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되면 반도체·디스플레이 3대 소재뿐 아니라 1100여개 소재·부품·장비 수입에 차질이 생길 수 있어서다.
31일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서울·부산·인천 등 전국 12개 지방청에 설치·운영 중인 '일본수출규제 애로센터'에 접수된 피해 사례는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기부는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 이후 7월9일부터 유관기관과 민간단체 등이 참여하는 '일본수출 규제대응 태스크포스(TF)'를 조직, 지난 15일부터는 애로센터를 운영해왔다.
중기부 관계자는 "지난 한 달 동안에는 수출규제가 반도체·디스플레이 3개 소재에 국한됐기 때문에 중소기업에 직접적인 피해 사례가 생기지 않은 것"이라며 "앞으로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현실화되면 적용 대상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는 기업들이 생길 우려가 큰 상황"이라고 했다.
중기부는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대비해 무역보복으로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에는 '긴급경영안정자금(긴급자금)'을 지원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긴급자금 신청요건에 '일본 수출규제 피해' 항목을 신설했다. 일본 관련 피해기업에 한해서 '매출 10% 이상 감소', '지원횟수 제한' 등 기존 긴급자금의 지원 요건도 따지지 않을 계획이다. 긴급자금은 이번 추가경정예산으로 1080억원을 신청한 상태다. 이외에도 수출규제 회피, 대체 수입선 확보 등 민간전문가를 활용한 '단기 컨설팅' 지원사업도 신규 운영한다.
현재 애로센터에는 피해 접수 대신 여러 업종별 중소기업들에서 들어온 요구 사항들이 쌓이고 있다. 중장기적인 연구·개발(R&D) 인프라에 대한 요구나 소재·부품 관련 국산화 관련 정책이나 지원을 만들어 달라는 목소리들이다. 중기부 관계자는 "수입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대표들이 답답한 심정을 섞어서 직접 국산화에 필요한 부분을 요구하거나 국내 규제 문제를 지적하는 의견들을 내놓고 있다"고 전했다.
대다수 중소기업은 당장 뾰족한 대비책이 없는 상황이다. 반도체 웨이퍼에 덮어씌우는 '마스크'를 생산하는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핵심 3대 소재는 아니더라도 30여개 화학소재 등 원재료 대부분을 일본에서 수입해서 쓰는데 지난 한 달간 직접적으로 받은 영향은 없었다"면서 "실제 수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남아있기 때문에 일본 현지 상황을 계속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전자제품에 쓰이는 인쇄회로기판(PCB)을 생산하는 반월국가산업단지 내 한 중소기업 임원은 "공정에 쓰이는 원재료는 거의 다 국산화됐고 일부 중국이나 유럽에서 수입해서 쓰는 상황"이라며 "무역보복이 확대돼도 소재·부품 수급에는 큰 문제가 없을 듯한데 장비들은 여전히 60% 이상이 일본 제품이라 어찌될 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이민하 기자
일본의 반도체 부품 수출 규제 소식에 7월 한 달 간 증시에서 시가총액이 85조원가량 증발했다. 수출규제로 인한 피해가 실제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투자심리가 극도로 악화되며 주가를 끌어내렸다.
증시 전문가들 사이에선 상황을 간과했다는 자성론이 흘러 나오는데, 사태해결이 지연되면 후폭풍이 더 클 수 있다는 우려도 확산된다.
3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 지수는 지난달 말 2130.62에서 이날 2024.55으로 4.98% 하락했고 코스닥 지수는 690.53에서 630.18로 8.74% 낮아졌다.
이로 인해 코스피는 64조원, 코스닥은 20조원 가량 시가총액이 감소했다. 한 달 만에 한국증시 평가액이 85조원 가량이 증발한 셈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이달 초 시작됐지만 지금까지 실질적으로 관련 업체들에게 타격을 주진 않았다. 규제 내용 자체가 수출 전 신고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그동안 업체들이 미리 받아놓은 물량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투자심리에는 직접적인 타격을 줬다는 것이 전문가들 분석이다. 미중 무역분쟁, 기업실적 둔화 등 국내 증시를 억누르는 요인은 많았으나 한일분쟁이 영향력이 가장 컸다는 지적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반성문을 쓰고 있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일본 안팎에서 흘러나왔던 경고음을 '허장성세'로 해석한 탓에 대응이 늦어졌다"며 "우리 뿐 아니라 대부분 증권사에서 초기 투자판단이 적절치 못했다며 리서치 책임론이 불거지는 중"이라고 털어놨다.
대부분 증권사들은 "상호 경제 연관성 때문에 일본이 규제를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을 내놨으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여기에 참의원 선거가 아베 정권에 유리한 구도로 마무리되면서 오히려 '확전 가능성'이 대두됐다.
하인환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당초 일본의 수출 제재가 참의원 선거를 위한 단기 이벤트이길 바라는 분위기가 컸다"며 "그러나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이 이뤄질 경우 한일 분쟁의 장기화가 불가피하다"고 우려했다.
이경민 대신증권 투자전략팀장도 "일본 아베 정부의 한국에 대한 게릴라성 규제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며 "이로 인한 금융시장에서의 투자심리 위축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재고소진'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있었으나, 역으로 ‘반도체 생산 차질’을 우려하는 상황이 됐다.
현재는 전문가 대부분이 분쟁 장기화에 무게를 두는데, 증시에는 미•중 무역분쟁을 넘는 파장이 있을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일본의 공격대상이 반도체에 국한돼 있으나, 향후 여타 산업으로의 무역보복이 현실화된다면 손익계산서가 더욱 복잡해진다.
일반 제조업에 해당하는 공작기계 및 정밀부품에서도 일본산 비중이 큰데, 이 부분이 타격을 입을 경우 산업전반에 막대한 피해가 불가피하다. 범위가 넓으면서도 정확한 현황파악이 어려워 피해규모가 추산되지 않는데 이는 시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이다.
전문가들은 양국이 마땅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빨라도 내년 초까지는 분쟁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한다. 여기에 수출감소, 실적둔화, 내수침체 등 악재가 겹친 탓에 한국증시가 당분간 보릿고개 행군을 이어갈 수 밖에 없다는 전망이 많다.
박기현 유안타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일 무역분쟁 장기화 우려에 미국의 통화완화정책 기대감 축소 등 부담스러운 요인이 많다"며 "당분간 변동성 확대에 대응하는 보수적인 전략이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반준환, 이태성 기자
30일 오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52개 지방정부로 구성된 일본수출규제 공동대응 지방정부연합 주최로 열린 '일본 국제질서 위반 경제보복 조치규탄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이어진 지 한달이 되면서 한일 정부간 관계악화가 기초지방자치단체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국민들이 먼저 일본제품 불매 운동에 나선 후 구청장들도 직접 나서 대(對) 일본 비판 성명을 발표하며 반일본 민심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52개 지방정부로 구성된 '일본 수출규제 공동대응 지방정부 연합'은 30일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우리나라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에 맞서 자행된 명백한 경제보복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 11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 대형태극기 앞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규탄대회' 공동성명을 통해 "일본 정부에 부당한 수출규제 조치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이들은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개소된 이래, 3.1만세운동으로 잡혀 온 유관순 열사가 숨을 거두는 등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난을 치른 역사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규탄대회를 열어 반일 민심에 불을 지폈다.
이들은 또 우리나라 정부의 향후 행보와 관련 "WTO(세계무역기구) 제소와 소재개발 예산지원에 그칠 것이 아니라 해외의존도가 높은 소재의 국내개발 지원 등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면서 "(지방정부 차원에서) 시민들의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일본여행 보이콧 등 생활실천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동참하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지방정부 공동성명을 주도한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한일 양국 간의 신뢰와 국제 무역질서를 깨뜨린 일본 정부의 부당함을 강력히 규탄하기 위해 전국의 지방정부들이 함께 힘을 모으게 됐다"며 "오늘 우리의 목소리가 널리 퍼져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불러일으키는 단초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지방정부 연합을 대표해 문석진 서대문구청장, 염태영 수원시장, 정원오 성동구청장, 김미경 은평구청장, 김수영 양천구청장, 이창우 동작구청장, 박용갑 대전 중구청장이 자리에 함께 했다.
서대문구청 관계자는 "지방정부 연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강력히 대응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구청장들의 동참의사를 받아 규탄대회를 개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지난 전국시장 군수 구청장협의회에서 이미 밝혔듯이 ‘일본제품 불매운동’ 전개와 함께 공무수행을 위한 일본방문 중단 등이 기초자치단체에서 결의된 만큼 관계 개선 전까지는 지자체간 교류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시교육청은 지난 24일 한·일 청소년 평화교류 10기 교류단 일본 방문일정을 전격 백지화했다. 일본을 방문해야 하는 부담감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앞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한일 갈등 관련 지난 10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아베정권은 정치적 이유로 인류 보편적 상식도, 국제적인 규범도 WTO(세계무역기구) 규정도 무시하고, 경제적 우위에 있다는 점을 이용해 가해자가 오히려 '적반하장"식 보복을 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거돈 부산시장도 지난 28일 "부당한 아베 정부의 경제보복 조치가 조속히 철회돼 정부 간 관계도 하루빨리 정상화되길 기대한다"며 부산시와 일본 간 행정교류를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오세중 기자
격화된 한일 갈등의 시발점은 지난해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이다. 지난해 10월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이춘식씨 등 4명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각 1억원씩을 배상하라고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후 하급심에서도 일본 전범기업들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대법원 판결 이후 즉각 반발했고, 배상 이행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대법원에서 확정된 손해배상금을 전범기업들로부터 받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고 있다.
◇ 일본 전범기업 손해배상금 받기 위한 법적 절차,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대법원 판결 이후 국내에선 일본제철, 후지코시, 미쓰비시중공업과 같은 전범기업 국내 재산을 압류하기 위한 법적 절차가 진행 중이다.
지난 5월1일 처음으로 일제 전범기업들의 국내 자산에 대해 강제매각절차가 시작됐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대법원 확정판결에 근거해 압류했던 일본제철, 후지코시의 국내 자산을 매각해달라고 법원에 신청하면서다.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단은 이날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과 울산지방법원에 각각 '일본제철이 소유하고 있는 주식회사 피엔알의 주식 19만4794주(9억7400만원 상당)'와 '후지코시가 소유하고 있는 주식회사 대성나찌유압공업 주식회사의 주식 7만6500주(7억6500만원 상당)'에 대해 매각명령신청을 냈다. 이 주식들은 지난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대법원 승소로 올들어 압류가 이뤄졌다.
당시 대리인단은 "강제동원 가해기업을 비롯한 그 어떤 주체로부터의 의사표시도 받은 사실이 없다. 이에 한국 대법원 확정판결로부터 반 년이 지난 지금, 대리인 지원단은 더 이상 현금화 절차를 늦출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고 환가절차(압류한 주식, 특허권 등을 처분해 돈으로 찾는 절차) 시작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진행은 더디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 16일 법원행정처는 "7월4일 일본제철 관련 주식의 특별현금화명령을 위한 심문서 및 국내송달장소 송달영수인 신고명령의 송달촉탁서를 접수하고 7월8일 이를 발송했으며 현재 위 서류가 아직 일본 기업에 도착하지는 못한 상태"라고 밝혔다. 강제매각 절차가 시작되긴 했지만 아직 일본제철이 관련 심문서를 송달(소송법상 당사자 기타 이해관계인에게 소송관계 서류의 내용을 알리기 위해 법원이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서 서면을 보내는 것) 받은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해당 문서가 송달된 후 60일 이내 일본제철의 답변이 없으면 법원이 심문 절차 없이 매각 허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법원이 실제로 재산 매각을 결정하기 위해 별도 감정이나 심문 절차를 거치거나, 결정을 일본 기업들에 송달하는 등의 기간 등을 감안할 때 자산이 실제 현금화되기까진 장기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강제징용 등 전범기업 피해자 측의 움직임은 빠르다. 지난 23일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피해자 소송 대리인단은 미쓰비시중공업이 국내에서 소유한 특허권 6건과 상표건 2건에 대한 매각명령신청서를 대전지법에 접수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지난해 11월 대법원이 피해자 5명에게 1인당 1억~1억5천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확정 판결을 내렸지만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같은 날 서울중앙지법 민사51단독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국내 재산 명시신청에 대해 '각하'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앞서 대리인단은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해 지난 4월24일 서울중앙지법에 재산명시신청을 제출했다. 재산명시신청이란 재산이 있으면서도 빚을 갚지 않는 채무자의 재산을 공개해달라고 채권자가 법원에 요청하는 제도다. 소송에 패소한 피고가 판결에 따른 돈을 지급하지 않고, 채무자의 재산 범위를 모르는 경우 원고는 법원에 피고의 재산을 명시해달라는 신청을 낼 수 있다. 대리인단 측은 "미쓰비시 중공업의 상표권과 특허권 등이 이미 압류된 사실이 있으나, 지적재산권 이외의 재산을 확인하기 위해 재산명시신청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징용·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유족 등 5명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총 5억여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고, 이 사건은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미쓰비시 측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이행을 계속 미뤄왔다.
이날 법원이 피해자들의 명시신청에 각하 결정을 내린 건 '송달 불능' 때문으로 풀이된다. 서류가 전달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통상 재산명시신청에서 채무자가 법원이 보낸 서류를 받지 않을 경우 채권자는 법원으로부터 보정명령을 받고 주소 보정(수정 및 보충)을 하게 되는데, 보정을 거쳐도 송달이 되지 않는 경우 각하 결정을 받게 된다.
본래 재산명시신청이 기각·각하된 경우 채권자는 사유를 보완하지 않고 다시 재산명시신청을 할 수 없지만, 서류 '송달불능'으로 인해 각하된 경우엔 채권자의 귀책사유가 없었던 걸로 인정돼 민사집행법에 따라 다음 절차인 재산조회신청을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조만간 공공기관·금융기관·단체 등에 미쓰비시중공업 명의의 재산에 관하여 조회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 손해배상 판결 이행 두고…논쟁 계속 될 전망
일본 전범기업 측의 손해배상 판결 이행을 둘러싼 법적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법원에 계류된 사건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강제징용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소송에 나서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단의 김세은 변호사는 "현재 서울중앙지법에 추가로 제기한 소송의 피해자는 31명 정도이고, 다른 지역에서도 여러건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피고가 될 일본 기업의 수도 12곳 정도로 추려지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반면 배상 당사자인 일본 전범기업은 그 어디도 배상 협상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일본제철, 후지코시, 미쓰비시중공업 등은 '한일 양국 정부가 협상해야 할 일이며 기업이 직접 협상에 응하지는 않는다'는 취지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리인단은 법적 절차를 통해서라도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는 단호한 기조 속에서도 일본기업들과의 협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단 측은 지난 16일 열린 대한변호사협회 일제피해자인권특별위원회 기자간담회에서 "전범 기업으로부터 협의를 하겠다는 의사가 전달되면 저희는 협의를 진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안채원, 오문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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